-
우리 농촌은 그동안 한국 사회의 근대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왔다. 이런 변화는 무엇보다 생명농업의 변질, 돈에 이끌리는 농촌, 농업에 대한 존중 상실로 인한 농적(農的) 가치관 부재의 농민으로 모습을 변질시키며 농촌을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마을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마을공동체 문화가 붕괴하였고 그나마 잔존해 있던 농촌문화도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예전의 농촌 마을공동체 붕괴가 산업화로 말미암은 도시로 쏠림 현상이었다면, 지금의 농촌 마을공동체 붕괴는 농업정책에 따른 영향이 크다. 지금까지 농업정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규모를 극대화해 소득증대를 이루는 농가 혹은 기업이지, 작은 규모 때문에 생산성이 낮게 취급되는 소농이나 마을공동체가 아니다. 결국, 이런 농업정책은 생산성과 경쟁력 중심의 농촌을 우선 고려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렇지 못한 다른 요소는 부차적이게끔 만들었다. 정책의 입안자들 머릿속에서는 농업이 산업의 측면으로만 보인다. 그들은 지속 가능한 농촌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마을공동체의 붕괴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아니다.
“농촌의 6차 산업화를 앞당기겠다.” 지난 1월 12일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곧바로 농업의 6차 산업화, 글로벌 경쟁력 강화, 행복한 농촌 만들기 등을 3대 핵심 과제로 꼽았다. 6차 산업화란 농촌을 경작에서 제조와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융복합산업단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중심 내용 가운데 하나는 첨단화와 대규모화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며, 이런 성장을 통해 행복한 농촌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곡물 자급률은 해마다 하락하고 있으며, 농촌의 고령화와 농가소득 정체 등은 우리 농촌의 현실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수입농산물은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전체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결국, 이런 농업정책과 성장 우선의 가치관이 전통적인 농촌을 빠르게 해체하고 있다. 농민이 경영인이 되고 농업이 공업화되는 농촌에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농업과 건강한 마을공동체의 근본을 농업에서 찾는다는 것은 이제 쉽게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이상기후와 자원의 고갈, 세계적인 식량위기 경험은 시장중심과 경쟁중심의 기존 패러다임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점점 더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규모를 키워야만 경쟁에서 이긴다고 말해왔지만, 이미 미국만 하더라도 미국 농업과 농촌사회의 토대는 규모가 큰 농장이 아니라 가족농과 소규모 농장이라며 건강한 소농 육성을 중요한 농정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고 건강한 소농 육성은 건강한 농촌공동체를 유지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농업예산 가운데 많은 부분을 직접지불제에 할당하면서라도 농가소득을 보존해주고 농촌공동체 유지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미 연방정부는 정부 지원이 없으면 농민은 농촌을 떠날 것으로 판단하고 직접지불제 비율을 2004년의 15.2%에서 2005년 33.2%로, 2011년 33.5%로 꾸준히 높여가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정부는 2013년까지 직접지불사업 예산비중은 23%, 농가소득 중 직접지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0%까지 확대하기로 약속했지만, 2013년 실적을 보면 직접지불사업 예산비중은 18%, 농가소득 중 직접지불금 비중은 4.3%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정부의 농업정책은 지나치게 석유 의존적이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더욱더 석유에 의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작물이 성장하면서 하늘로부터 공짜로 받는 햇빛에너지를 빼면, 씨앗에서부터 농약과 각종 농자재, 논밭을 갈고 농약을 주고 또 가을걷이하는데 들어가는 각종 농기계까지 석유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미국의 사회비평가인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장기비상시대’는 우리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중요한 대목들이 나온다. 세계화로 알려진 지금의 경제구조는 석유신화의 논리적 정점이며, 세계화의 사멸은 값싼 석유시대의 종말과 일치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거대한 정부의 붕괴와 함께 지역주의의 부활을 예견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농업은 엄밀하게 말해 현재의 햇빛에너지와 인간의 노동력이 존중받는 가족농을 중심으로 한 자립농업, 지역에 기반을 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지역자치농업이라야 가능하다. 이러한 일은 농촌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마을이 자리를 잡을 때 가능하며, 진정한 농업의 세계적인 경쟁력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농촌공동체가 유지되고 농촌 마을이 순기능(順機能)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상품가치로 평가하는 시장주의의 허점이 우리의 현실에서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시장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농산물 역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에 불과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농산물 역시 자유무역의 대상인 것이며 비교우위에 따른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상품가치로만 볼 때, 농업이 지닌 다원적 가치는 철저하게 부정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를테면, 논농사의 경우 쌀의 가치만 인정한다면 상품화되지 않는 생태보전, 산소공급, 홍수조절기능 등의 다원적 기능은 가치평가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쌀 생산을 포기하는 순간 논이 수행한 이 기능이 사라지고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본다. 쌀을 수입하면서 논의 다원적 기능을 함께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촌 마을의 진정한 가치는 논농사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다원적 기능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모든 곳에서 그렇게도 실용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용의 실질적인 시작은 농촌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지역의 먹을거리 체계를 구축하고 농촌을 건강한 공동체로 만드는 것은 농민들을 분리하고 경쟁을 시켜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마을공동체 중심으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해야 가능한 것이다. 지금 다양한 마을 만들기 사업은 오히려 도시에서 활발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을은 근본적으로 농적(農的)인 세계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흙과 어우러지고 협력과 공유와 끊임없는 접촉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도 지금은 경제적 이익 갈등의 구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농적인 생명을 이해하지 않고는 아무리 행복한 마을을 가꾼다고 해도 시간이 갈수록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도시 지자체들은 마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할 때 건강한 농적인 생명을 가진 본래의 농촌 마을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대안은 마을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농촌이 위기에 처하고 마을공동체가 붕괴하는 상황을 지켜만 본다면 미래에 대한 담론은 불가능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원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이고, 사람이 살만하고 영성이 어우러지는 그런 마을을 만드는 일이다. 마을은 다양하다. 마을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더불어 하나가 된 공동체이다. 농사짓고 살아가는 것이 중노동이고 고통뿐이었다면 벌써 농업과 농촌은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일이 힘들고 맨날 손해만 보는 것 같은데도 귀농을 하고 농촌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이들의 삶이 흙과 더불어 자연과 상생하고 유기적인 접촉으로 근원적인 생명감각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지금 곳곳에서 정부와 지자체가 정책적으로 주도하는 농촌 마을 만들기 사업을 보면 많은 돈을 투자해서 투자가치를 최대한 보존하려는 경제사업과 같다. 성공적이라고 하는 마을을 보면 마을이 얼마나 최신식 모습을 갖췄고, 사람이 얼마나 오고, 농산물 가공 규모가 어떻게 커졌는지 등 종합개발사업의 완성품을 보는 것 같다. 전래의 공동체성은 홍보에나 사용하는 등 별로 관심이 없다. 마을 만들기 사업도 생산성과 경쟁력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경쟁력이 없는 마을은 계속 뒤로 밀리기만 한다.
본래 정책으로서 농촌 마을 만들기 사업은 제도와 지침마다 마땅히 농민이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나서 계획을 세우고 사업도 꾸려가도록 규정하고 명시해놓고 있다. 하지만 평생 땅에만 매달려 농사만 짓고 살아온 대다수 농민들은 사업지침대로 그런 일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렵다. 규모와 결과에 집착하는 마을 만들기는 시작부터 능력을 따지는 차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물론 다양한 마을 만들기 교육프로그램이 끊이지 않고 가동되고 있지만, 서둘러 배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넘치는 의욕이 일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정책적인 마을 만들기에 성공한 마을이라고 해서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리적으로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산촌 마을에 가서 산촌 마을 사업을 주도한 그 마을 이장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장의 고민은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 내부에서 경제적 이익의 배분 때문에 사람들이 신경이 곤두서있고, 조금만 경제적인 문제가 생겨도 다툼이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서 마을이 화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화하니 차라리 예전의 모습이 더 좋았다고 한탄도 한다. 물론 모든 마을이 똑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정책적인 마을 만들기 사업이 어떤 것인가를 어느 정도 느끼게 하는 말이었다. 결국, 정책적인 마을 만들기도 산업적 측면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또한 이윤 창출을 위한 산업화의 한 단면이지 진정으로 농촌 마을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본래 마을은 전래적이고 자생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무인도라도 자본만 쏟아 부으면 마을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마을은 자본의 힘에 의해서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을 느끼며 전통을 존중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함께 농사를 짓고 삶을 나누는 공동체의 터전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을을 세우는 일은 마을공동체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와 깨달음이 없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마을은 전업농과 기업농이 아니라 가족농 혹은 소농이 중심이 될 때 본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이런 마을들 때문에 한 나라가 튼튼해지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지금은 위기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더 분명한 것은 전환의 시대이다. 지속 가능한 삶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알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을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편리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여러 요소가 함께 어우러진 공동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의 구조는 여전히 농촌과 마을공동체에 대하여 폭력적이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바른 모습을 가질 수 없다. 마을의 행복은 6차 산업화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경쟁력 강화보다 평화를 이루는 일, 이웃 간 소통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일이 행복의 시작이다. 무엇인가를 이루는 일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서로 관심을 갖고 함께 어울리는 삶은 더 위대하다. 그래서 마을은 위대한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