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낙심천만이다. 농촌에 살면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 적은 별로 없었다. 오래도록 함께 살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누구라도 주변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야 당연한 인간사이니 낯선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분들이 마치 여행 가듯이 훌훌 떠나는 일은 처음이니 남은 사람들이 받는 충격이 크다.
돌아보니 나도 나이가 들었지만 지난 세월에 모두 연로해졌다. 연로해지니 힘이 없어지고, 그간 농사짓느라 쌓인 중노동의 흔적이 몸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마음이 아픈 것은 그래도 농사를 쉴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의 부양을 받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많다. 몸을 가누기 어려워도 농사를 지어야 근근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몸이 아파도 일 때문에 돌보지 못하고, 일 때문에 몸을 돌볼 틈도 없으니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계속 병원으로 실려 간다.
아버지처럼 따뜻함을 주시던 한 분은 폐 질환의 하나인 폐섬유화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몰랐다. 지난 늦가을 경운기 사고로 인한 척추 수술 후유증 때문에 폐에 신경을 쓸 틈도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감기처럼 찾아온 폐렴을 치료할 수가 없었다. 폐섬유화증 때문에 약물을 투여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자녀들을 모두 볼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서 그분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은총이었다. 아직 빛도 여린 새벽녘, 중환자실에서 자녀들에게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눈물의 배웅을 받았다.
22년 전, 농촌에서 아직 자리를 잡기도 전에 그분이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돈을 조금 빌려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 무척 어려우신가 보다 생각하면서 바로 그달 생활비를 모두 건넸다. 아내를 보고 있으니 한 달을 살아갈 일이 걱정되었다. 그래도 마음은 곧 편해졌다. 다시 받을 것은 아예 생각도 않고 어쨌든 최대한 절약하기로 했다. 사람은 그렇게 환경에 적응되나 보다. 아예 안 쓰기로 작정(?)을 해서인지 이상하게도 그달은 돈 쓸 일이 별로 생기질 않았다. 생활이 불편하지도 않았다. 먹는 것도 부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는데, 생각지도 않게 빌려 간 돈을 갖고 왔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고마운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그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몸으로 사는 방법을 조금 깨달았다.
본인도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자녀들이 어렵게 살았다. 손주들을 맡아서 키울 수밖에 없었다. 큰아들은 아예 내놓은 자식이었다. 둘째 아들은 가난 때문에 멀리 중남미로 나가더니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일하느라고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것이 결국 병역법에 저촉되어서 20년 넘게 이별을 해야 했다. 그동안 가장 큰 소원이 둘째 아들을 보는 일이었다. 최근에서야 겨우 한 번 다녀갔고, 위중한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와서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처음엔 화장해서 유골을 수목장 형식으로 밭에 뿌리기로 했다가, 그래도 봉안당에 모시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친지들 간의 논의가 있어서 화장터 옆에 있는 봉안당에 모셨다. 일기예보에는 없었지만, 화장터 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유골 항아리를 마지막으로 만지는 아들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나도 눈이 부었다. 입으로는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래도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것보다 여기서 같이 있는 것이 더 좋은데’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다른 장례식에서 들은 애절한 소리가 내 마음에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에 아버지와 같았던 또 한 분이 급작스럽게 곁을 떠났다. 이렇게 가시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에 그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몸이 좀 불편해서 청주에 있는 딸 집에 갔는데, 그곳 병원에서 신장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려니 하고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도 몸에 문제가 계속되었다. 수도권의 큰 병원으로 옮겨서 정밀진단을 하니 폐렴도 발병했다는 것이다. 청주 병원에서도 폐렴일 수 있다는 진단이 나왔었지만, 휴일 때문에 정확한 처방이 없어서 마음이 급한 자녀들이 수도권 병원으로 옮겼었다. 신장 치료와 폐렴 치료가 동시에 이뤄졌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나를 보더니 미소를 띠고 여러 말을 하셨다. 마음이 조금 여린 부분이 있어서 본인 병에 대한 근심이 있었지만, 의사 말이나 자녀들의 말을 들어보니 치료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빨리 회복해서 내려오시라고 말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위독해져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급성 패혈증이 와서 치료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많은 분이 회복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는데도 결국 며칠 내로 우리 곁을 떠났다. 그날 아침에 소식을 들었고, 정오 무렵 고향 장례식장으로 내려온 그분을 슬픔으로 맞았다. 연로해서 언제라도 세상을 떠나면 자연사(自然死)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이었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지내다가 이렇게 갑자기 이별을 당하니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돌아보면 마을의 어른으로서 지혜 있는 말씀으로 중심을 잡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한 마디 위로의 말로 일으켜 세웠다. 모두 진심으로 애통해 했다.
장례를 치르던 날은 그 전날 내리던 비가 어디로 갔는지 땅은 적당히 푹신했고, 하늘은 밝게 빛났다.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유족을 위로했고, 유족들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자연사(自然死)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마지막 취토(取土)를 하는 순간, 함께 늙어가던 아내가 흙이 되려는 남편을 향해 울음을 터트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린 울음은 듣는 모두에게 진한 슬픔이었다. 다들 눈물을 글썽이는데, 옆에서 혼기가 꽉 찬 손녀가 제 눈의 눈물을 닦으며 할머니를 위로했다.
“할머니. 힘을 내세요.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이젠 아프시지도 않고 편히 계셔요. 이곳에 계신 것보다 더 좋으실 거예요.”
그러자 할머니가 손녀의 손을 잡으며 힘없이 말했다.
“아무리 그곳이 좋아도 여기만 하겠니?”
‘여기만 하겠니?’란 말이 내게 울림이 되었다. 갑자기 장례가 예식에서 현실이 되었다. 현실을 지탱하는 방법의 하나가 희망을 품는 것인데, ‘여기만 하겠니?’란 말 속에서 희망을 떠나보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여기에 함께 있어야 그를 통한 기쁨도 누릴 수 있고, 서로 삶의 버팀목도 될 수 있는데 말이다. 그가 없으니 이제 어떻게 힘을 낼 수 있단 말이냐는 역설적(逆說的)인 할머니 말을 손녀는 얼마나 알아들었을까?
인터넷에서 읽은 소설가 故 박완서의 글을 차용한다. “천당에 대한 확신이 있는 분이 천당을 마치 골고루 답사하고 온 것처럼 구체적으로 그려 보이는 설교를 들어본 적도 있습니다만 어쩐지 하나도 마음에 차지 않고 차라리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원색적인 속담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걸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삶이란 기쁘고 보람이 있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함께 있는 것. 사랑도 미움도, 즐거움도 고통도, 힘들고 편안한 것도 함께 있어서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식이 있어서 부모가 되고, 남편이 있어서 아내가 되고, 이웃이 있어서 내가 된다.
옆 마을 교회 목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마을에 사시는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 한 분이 어느 날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나름으로 열심히 나오셨다. 만날 때마다 인사도 하고, 때로는 식사도 같이했다.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 하늘나라에 관해서 설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바울 이야기를 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전할 수만 있으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했고, 그에게서 죽음은 그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여러분도 그런 믿음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뒤에서 졸던 그 할아버지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혼잣말로 낮으면서도 묵직하게 말했다.
“뭔 쓸데없는 소리여!”
예배당 안에 퍼져나가는 울림이 되었고, 목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웃고 말았다.
지금 또 한 분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번에는 어머니 같은 분이다. 암 선고를 받았지만, 여간 씩씩해서 당연히 건강을 회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엊그제 본 모습은 말을 잃게 하였다. 그래도 삶을 응원하는 말은 멈추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 모두 같은 마음이다.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주변을 맴돈다.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이지만 밭에 난 풀이라도 뽑아주고, 혹시라도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조그만 냄비에 이것저것 만들어서 가져오기도 한다. 이제 칠십이라서 농촌에서는 젊은이(?)에 속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한과를 만드는 법, 도토리묵을 만드는 법 등 이런저런 기술을 가르쳐줬다. 배운 사람 가운데는 마을 기업 형태로 한과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이도 생겼다.
거동하기도 힘들어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메르스 여파로 병문안 어려워서 전화로 묻기만 한다. 아무래도 다시는 집에 내려오기가 어려울 듯싶다. 안타까움이 크다. 그동안 같이 나눴던 즐거움과 고통이 하나씩 선명하게 스쳐 간다.
사람은 혼자라고 할 수도 있고, 함께라고 할 수도 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을 돌아보면 혼자라고 할 수 있지만, 무인도에서 사는 것이 아니기에 같이 생각하고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은 함께라고 할 수 있다. 폐교 위기에 처한 농촌학교를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등하교 차량운전을 한 지도 십 년이 되었다. 나도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다. 내가 운전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함께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늘 새롭다. 십 년 전 교육청의 예측에 의하면, 이미 오 년 전에 아이들 부족으로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여전히 50여 명에 이르고 학교는 더욱 활기차다. 사람들은 헌신의 수고가 학교를 살린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는 마음만 있다면 그 수고는 헌신이 아니라 감동이고, 그리고 그런 마음이 모이면 길은 새롭게 열린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이 사는 것이 필요하다.
아침에 면 소재지 삼거리를 지나다 보니 신호등 옆에 장례식장 현수막이 걸려있다. ‘파격적인 할인 혜택’, ‘무료 운구 서비스’, ‘24시간 대기’ 등의 문구가 눈길을 끈다. 무심코 바라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장례식장 사장도 친분이 있어서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가 얼마나 열심히 영업을 위해 뛰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장례식장이 없으면 요즘 농촌은 장례를 치른다는 것이 엄두도 안 날 것이다. 그리고 보면 이 또한 함께 사는 일이다. 아마 올해 몇 번은 장례식장에 더 갈 것 같다. 다만 그 시간이 늦춰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조금 더 같이 살아야 할 분들이 떠나거나 떠날 준비를 하는 현실은 낙심할 수밖에 없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농촌에 한둘이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만들어 온 공동체가 허물어지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채울 수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봤다. 불과 십 이삼 년 전만 해도 모두 청춘의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멋있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은 몸을 의지하는 유모차(?)가 없으면 마을 노인회관에도 가지 못하고, 조금 가파른 언덕길에서는 경운기를 제어할 힘도 없다. 얼마 전에도 한 분이 고구마밭에 물을 주기 위해 경운기에 물통을 싣고 가다가 경운기 채로 언덕에서 굴렀다. 급한 전화를 받고 의료원 응급실로 황망히 가니,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다. 얼굴은 터지고 피는 귀에서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는 데도 말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이렇게 사는 길을 택했으니 아주 좋았다. 손을 꼭 잡고 같이 울었다.
“아무렴, 여기만 하겠니?”
이 말이 요즘 자꾸 떠오른다. 서로 버팀목이 되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함께 가는 이 재미를 어디서 누릴 수 있을까? 부디 건강하시라. 나이가 들어 호흡기가 약하니 메르스 근처에도 가지 마시고, 기계를 만지다가도 무언가 이상하다 싶으면 먼저 도망부터 치시기를. 감자를 캐다가 한 알 더 캐지 마시고 남겨놓은 채 그늘로 가시기를. 몸이 아프면 참지 마시고 나라도 부르시기를. 그리고 손주 생각하면서 삶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불태우시기를.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