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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읍성(喬桐邑城)에 서다이런저런글 2023. 6. 13. 10:05
1. 교동읍성(喬桐邑城)
얼마 전에 사진예술 현장 수업 장소로 강화도에 다녀왔습니다. 강화도는 사진을 배우는 선생님 작업실도 있고, 개인적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해서 오고 가는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특히 강화도의 또 다른 섬인 교동도에 갔는데, 그곳은 경기수영(京畿水營)이 자리했던 교동읍성이 있는 곳입니다. 교동읍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성이어서 그런지 바닷가의 한적한 장소에 유유자적(?)하고 있는 모습은 조금 낯설기도 하지만, 또 조금 익숙한 듯 했습니다.
교동읍성 자료를 찾아보니, 교동도에 경기수영을 설치한 때인 1629년(인조 7년)에 읍성을 쌓았다고 나옵니다. 교동읍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6m의 규모이고 동·남·북 쪽 3곳에 성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1753년(영조 29년)에 고쳐 쌓았고, 고종 때에 성문을 다시 쌓았는데, 이후로 언제인지 동문과 북문은 없어졌고,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에 폭풍우로 무너진 것을 2017년에 복원해서 지금을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강화도는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에서 전략적 가치가 중시되었습니다. 왕이 피신했다 재기를 도모할 수 있는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인조 즉위 1년 경기 남양만에 있던 경기수영이 강화도로 옮겨왔고, 정묘호란 후인 1629년에 경기수영은 군사 전략적 가치가 큰 섬 교동도로 다시 옮기면서 이때 교동도에 성곽을 쌓은 것입니다.
4년 뒤에는 경기수군절도사를 충청, 경기, 황해 3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어사로 승격시키며 교동에 삼도수군통어영을 신설합니다. 교동도가 삼도수군 지휘부가 된 것입니다. 19세기 초반까지 통어영에는 거북선을 비롯한 전선 21척과 군사 2,391명이 배속돼 있었다고 합니다. 교동읍성의 옛 위용이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교동읍성 이야기를 한 것은 제가 사는 보령시 오천면에 충청수영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동읍성에 자리했던 경기수영과 충청수영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충청수영은 경기수영이 교동도에 설치되면서 그 관할에 속했습니다. 백성보다 임금을 지키고자 했던 경기수영. 그리고 그 관할에 속했던 충청수영. 오늘 우리에게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그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2. 충청수영성(忠清水營城)
선조실록에 이항복과 선조의 대화에서 이항복이 1594년에 광해군과 함께 충청수영을 방문했는데, 한산도에서 온 충청수군 85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처자식들의 통곡 소리가 온 성에 진동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격군, 사수, 포수로 수군에 징집된 연안 거주민들이 북을 치며 선소를 떠났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동궁(東宮)께서 갑오년에 남방에 계실 적에 연해를 순심(巡審)하시다가 충청수영(忠清水営)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그날 한밤중에 온 성에 통곡 소리가 진동하였으므로 사연을 물어보니, 한산도에서 소식이 왔는데 죽은 사람이 83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처자가 모두 통곡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명령으로 충청수영군이 11척의 군선과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진에 처음으로 내려간 때가 1594년 3월 16일이었습니다.
보령 지역의 향토사학자 한 분이 이런 내용을 발췌해서 알려줬습니다. 보내 준 글을 처음 읽을 때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날 일부러 충청수영 성벽을 거닐면서 그 아픔을 가만히 새겨보았습니다. 내가 지금 거닐고 있는 이 자리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에 혼절하다시피 통곡하는 모습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오늘도 이런 비극적인 소식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습니다.
충청수영은 조선 중종 4년(1509년)에 성곽을 축조하였는데, 길이 3,174척(1,650m), 높이 11척, 우물 4, 못 1, 옹성 5, 성문 5이었다고 합니다.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피는 해안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부터 18세기 중반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많은 영사와 창고 등이 건축되고 보수되어 온 내력은 충청수영 사례집에 개략(槪略) 기록되어 있습니다.
충청수영은 왜란과 같이 남부에서 침입이 발생할 경우에는 통영에 위치한 삼도수군통제영에 소속되어 통제사의 지휘를, 호란과 같이 북부에서 침입이 발생할 경우에는 경기수영에 설치된 삼도수군통어영에 소속되어 통어사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상급 부대가 바뀌었던 셈이지요. 19세기 들어 이양선이 많아지는 시점에 와서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임진왜란 시기 충청수군들은 남해안보다는 경기도 방어를 주요 임무로 맡았기 때문에 임진왜란 시기에 충무공 이순신의 주전장인 남해에서는 당연히 전라수군이나 경상수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눈에 많이 띄진 않았으나, 그래도 나름 여러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특히 충청수사 최호(崔湖)는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 휘하에 들어갔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습니다.
3. 교동도 대룡시장
교동도에 가면 들러야 할 곳이 북한의 연백평야가 눈앞에 보이는 대룡시장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동도 사람들과 바로 앞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 사람들은 서로 옆집처럼 드나들었답니다. 장이 서면 장을 보러 갔고 혼기 찬 남녀의 중매가 이뤄지기도 했다는군요. 그만큼 교동도와 연백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매우 가까웠다고 합니다.
교동도는 조선시대 왕족 유배지로 유명했습니다. 광해군,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도 이곳에 유배당했고, 선조의 첫째 서자인 임해군과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또 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과 철종의 사촌 익평군까지 시대별로 유명인들의 유배지였습니다. 더 멀리로는 고려 때 최씨 무신정권에 쫓겨난 희종이 유배된 역사도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연백 사람들이 교동도로 건너왔습니다. 그래서 교동도는 실향민의 섬이라고도 불립니다. 연백 사람들은 전쟁이 잠잠해지면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고향에 다시 돌아갈 기약이 없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의 모습과 비슷하게 지은 것이 대룡시장이라고 합니다. 대룡시장은 10분이면 다 둘러볼 정도로 짧고, 두 사람이 나란히 가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좁은 골목시장입니다. 1960~1970년대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살아온 날의 애환과 가고 싶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묻어 있는 곳입니다.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하면서 강화도에서 교동도에 다녀오기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교동읍성이 옛 교동의 중심지였다면 대룡시장이 있는 면 소재지 대룡리는 현재 교동도의 번화가(?)이자 중심입니다.
4. 교동읍성(喬桐邑城)에 서다
우리나라 바닷가 읍성이란 왜적의 침입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수영(水營)은 그 역할이 막중한 군사적, 행정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기록에 뒤섞인 역사의 흔적들을 보면 수영이 백성들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했는지 의문이 많이 남습니다. 사실 수영은 임금을 보호하는 목적에 따라 움직인 곳이었다고 봐야지요. 그나마 임금이 보호됐느냐면 병자호란을 통해서 보듯이 그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충청수영성은 병인박해(1866년) 등으로 백성들의 사형장이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은 수영성의 보호보다 오히려 하늘의 은총을 누리며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하늘의 이치를 깨닫게 되니 임금도 죄인이고, 똑같은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임금도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할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은 무너지고 헝클어질 뿐입니다. 무너진 교동읍성에 서니 그 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 성은 미처 못 다한 말을 하려는 듯 마저 무너지지 않고 남은 모습으로 홀로 서 있는 듯 보입니다.
지금 교동읍성이 있는 교동도는 민간인출입통제선 지역으로 남북한 대립의 최전선 중 한 곳입니다. 차량 인식 단말기가 설치된 교동대교에서 군부대의 통제를 따라야 합니다. 남북한 관계가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면 불안이 밀려오는 현장입니다. 정치가 가볍게 움직이니 요즘 다시 수상해지고 있습니다. 대룡시장의 역사가 불안과 그리움으로 점철되었지만, 그 불안과 그리움을 풀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임금을 대체하려는 이들은 또 다른 성을 쌓아 올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동읍성은 백성이 주인이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성도 소용없음을 말해줍니다.
5. 다시 충청수영성(忠清水營城)
교동읍성에서 바다는 몇 걸음 떨어져 있고, 충청수영성에서 바다는 발치에 있습니다. 여전히 푸른 바다를 보며 사람들은 성벽을 지나갑니다. 사람들에게 수영성이나 읍성은 이제 역사의 흔적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런 흔적이 오늘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런 흔적이 어떻게 사진에 담길지. 이리저리 찬찬히 살펴보다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교동읍성 안길을 걷다가 흔들리는 풀꽃도 찍고, 성벽에 새겨진 희미한 글자도 찍었습니다. 미처 복구하지 못한 돌무더기(?)도 찍고, 힘겨운 듯 기대어 있는 빈집도 찍었습니다. 대룡시장도 찍었습니다. 비어 있는 시장 골목이 다가왔습니다. 사람들 발걸음은 분주하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뿐입니다.
교동읍성을 다녀오고 아직 충청수영성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강의 중인 보령 톺아보기 수강생들과 곧 충청수영성에 갈 것입니다. 보령과 강화도는 꽤 먼 거리지만, 오래전부터 연결이 돼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충청수영성에 밴 아픔도 돌아보고, 경기수영이 있었던 교동읍성과 이어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성안에서, 성 밖에서 살며 힘들게 성벽을 쌓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해볼 생각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돌을 깎고 한 단 한 단 올렸는지, 우리는 왜 오늘도 성으로 들어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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