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재생, 문화재생이런저런글 2018. 6. 14. 12:13
1. “조무래기들은 도깨비불만 보면 네 그르니 내 옳으니 하며 짜그락거리기 일쑤였고, 그러면 나이 좀 있는 사람이 얼른 쉬쉬하면서, 도깨비가 듣겠다고 나무라 주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이문구 <관촌수필>에서-
“어떤 사람이 문득 집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시퍼런 불이 커다랗게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불은 순식간에 열 개로 갈라져 번갯불같이 수직 벼랑에 한 줄로 오르내렸다. 그러다가 도깨비불이 하나씩 나오더니 여섯 개가 서로 붙어서 하나가 되었다. (중략)”
농경사회에서 빈번하게 출현했던 도깨비불은 현재 사라졌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도깨비불은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로 우리 귀에 맴돕니다. 생각해보면, 도깨비불은 두려움과 그것을 이기고자 하는 갈망이라고 여겨집니다. 도깨비불 이야기는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공동체 유대를 촉발하기도 했습니다. 보령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이문구의 글에도 도깨비불 단어가 가끔 나타납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도깨비불은 오늘 새로운 문화의 불로 나타납니다. 계획과 절차와 과정을 생략하고 순식간에 불이 하나에서 여섯 개가 되고 다시 하나로 붙듯이 누군가의 생각에 생각을 더해서 간단하고 자유롭게 불이 붙습니다. 누군가 '도깨비불이야!' 소리치면 마음에서 마음으로 모여 도깨비불이 사라질 때까지 기억도 끄집어내고, 현재 시각도 정리하고, 미래 그림도 그립니다.
지난 6월, 보령의 한 골목에 번져갈지 사그라질지 전혀 모를 도깨비불이 문화연구회 이름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래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요즘 곳곳에 도시를 재생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충만합니다. 움직임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일은 일방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고, 문화적 바탕에서 삶의 현장을 고민하는 시민들이 도시를 흔드는 문을 열어야 한다는 취지 아래 별다른 준비와 고민 없이 갑작스러운 도깨비불처럼 모이자고 모임을 열었습니다.
주머니 속의 것도 꺼내서 파는 자유 장터를 열고, 커피를 맘껏 마시고, 솜사탕도 먹고, 시(時) 이야기도 듣고, 그림 이야기도 듣고, 보령에서 태어난 이문구 산문과 시를 나눠서 읽기도 하고, 즉석 공연도 보면서 4시간 동안 도깨비불 놀이를 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모이면 보령이 조금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소망도 갖고서.
2. 도시 재생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현 정부의 주요 국정 과제 중 하나가 도시재생 뉴딜 사업입니다. 5년간 50조 원을 투자해 전국 낙후지역 500곳을 정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사업 대상지 절반 이상이 1000가구 이하 지역입니다. 원래 도시재생 사업은 2013년 6월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지정과 함께 그해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산업구조의 변화, 즉 도시 확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존 도시에 새로운 기능을 도입하고 창출함으로 쇠퇴한 도시를 새롭게 부흥시킨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2013년부터 시작된 도시재생 사업 중 눈에 띄게 성과를 낸 사업이 드뭅니다. 당연히 부동산 시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정부의 지원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도시를 재생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아무튼, 지금 정부는 매년 10조 원씩, 5년간 50조 원의 재원을 투입하여 도시재생 뉴딜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매년 100여 개의 노후화된 마을을 정비하고, 이를 통해 노후화된 도시를 바꾸고 공공임대 주택 확보, 중소건설업체의 일자리 창출까지 하겠다는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도시재생과 다른 분명한 것은 많은 예산을 지원해 확실하게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도시재생 뉴딜 사업의 장점이라면 원주민의 재정착을 높이고 쇠퇴한 구도심 또는 불량 주거지가 개선된다는 점입니다. 더불어 임대주택을 늘려 주거안정을 꾀할 수 있고, 도시가 활성화되면서 많은 일자리 창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려도 큽니다. 가장 우려하는 것이 매년 10조 원이라는 재원의 확보입니다. 재원 확보 방식은 여전히 논란거리입니다. 그 외에도 우려는 무척 큽니다. 그러나 우려가 큼에도 불구하고 이왕 시작한 도시재생 사업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때로 오류도 발생하겠지만 가야 할 길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특히 생활 문화가 그 기반을 든든히 받쳐주기를 바랍니다.
3. 제가 사는 보령은 우리 동네 살리기 유형으로 첫해 도시재생 뉴딜 사업에 선정되었습니다. 요즘 열심히 도시재생 사업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실 보령뿐만 아니라 전국이 몇 년간은 도시재생의 바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되면서 저도 직간접으로 이 일에 참여하고, 또 다음 사업을 위해 도심지 사람들과 도시재생 교육도 받고 서로 생각도 모으고 있습니다. 현장 교육 일환으로 서울에서 이뤄지고 있는 도시재생 사업 견학도 다녀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토목과 개발 논리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도시재생을 수익의 관점으로 보면, 도시재생을 통해 부동산값도 오르고 개발 이익에 손댈 기회도 늘어날 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생각이 도시재생의 한계로 작용한다는 것은 어지간하면 다 압니다. 하지만, 지역주민의 삶이 나아지는 것에 도시재생의 초점을 맞춘다면 고민과 함께 새로운 상상이 필요합니다. 새로움은 없는 데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도깨비불은 그런 마음의 표현입니다.
도시를 어떻게 재구성하든, 결국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지역공동체의 신뢰와 연대하는 문화입니다. 도시 자체가 각종 이익으로 점철돼 있기 때문에 신뢰로 형성된 공동체가 아니고서는 도시재생의 길은 험난합니다. 도시재생을 통해 그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확장되고, 경제 활동이 잘 연결돼야 건강하면서 지속 가능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도시재생에 대한 상상을 펼치고, 그 위에 정책 구상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4. 지역공동체 문화 역량을 높이는 일도 필요합니다. 문화는 연대의 힘을 키웁니다. 문화를 매개로 한 도시 만들기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문화를 통해 도시를 재생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생활문화를 진작시켜 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노력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문화는 정체성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소통의 언어입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일관된 정체성과 다양성이 문화를 통해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어떠한 힘으로 우열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며,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동력으로서 문화공동체의 힘이 됩니다.
문화를 매개로 한 도시 재생은 우리 삶에 상상력을 바탕으로 문화가 꿈꾸는 세상을 생활로 구현하게 합니다. 문화의 시작은 공동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모습과 자원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성원의 변화와 삶의 질을 보존하는 밑바탕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모든 것은 한 부분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모든 구성원은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나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도시재생은 자본의 힘으로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의 힘을 느끼며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함께 삶을 나누는 터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문화는 기억을 공유하게 합니다.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 행복이란 무너질 수 있는 불안을 늘 안고 있습니다. 예전에 마을 입구마다 있었던 마을 나무는 공동체의 기억을 듬뿍 안고 있다가 틈만 나면 마을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길을 넓히면서 나무들은 뽑혀 나갔고 기억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공유하는 기억과 행복을 가질 수 있는 도시재생이 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지속 가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5. 도깨비불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터전에서 삶의 현장을 재생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것을 공유하고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 도깨비불을 불러낸 것이 보령을 여행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해서 그 지역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르는 곳이 더 많습니다. 전부를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사는 곳을 하나라도 더 안다면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아지고, 지금처럼 재생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오갈 때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가보는 보령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함께 여행할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동안 1기, 2기, 3기 팀까지 여행을 했고, 이제 4기 팀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행(旅行)의 사전적인 정의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자기 거주지를 떠나 다른 고장 등을 나다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travel)’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travail’이라고 하는데, ‘일하다’라는 의미와 ‘고통, 고난’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먼 곳을 다녀오는 일이 무척 힘들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여행이 즐거움이 된 것은 19세기 이후 교통수단이 발달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행은 잠시 구경하고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갖기 마련인 주마간산 격 시선의 한계가 있지만, “여행은 인간의 독선적 아집을 깬다.”는 말도 있습니다. ‘직접 경험’을 통해 그동안 내가 가졌던 생각의 틀, 또는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멀리 있고 우리와 무관한 곳에 대해서 ‘직접 경험’의 기회를 가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가까이 있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곳에 대해서는 ‘직접 경험’의 필요성을 그렇게 느끼지 않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멀리 가기 위해서 가까운 곳을 바라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 삶의 미래는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여행은 늘 새로운 공부가 됩니다.
‘처음 가보는 보령여행’을 통해 오랫동안 보령에 살면서도 보령을 처음 여행했습니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보령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령 여행을 통해 보령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우리 삶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야 합니다. 함께 삶을 나눌 터전으로 도시재생을 해야 한다면 여행을 통해 우리가 사는 보령을 알아가는 일은 보람이 있습니다.
가본 곳을 잠깐 소개합니다. 혹시 보령에 오시면 함께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장항선에서 특히 보령에서만 볼 수 있는 철길 풍경, 영화 택시 운전사를 비롯한 촬영현장, 한 사람의 숨결이 오붓이 담긴 수목원과 여성의 위대한 힘으로 감탄이 나오는 해변 정원, 새로운 교육을 실천하는 천북중학교와 낙동초등학교, 유기농 철학을 가지고 삶의 건강을 나누는 유기농 우유목장, 더뎌도 하나하나 숨 쉬는 그릇을 만드는 전통옹기 방, 조선 말 백성의 고통과 희망이 어우러진 역사의 현장, 바다를 내려다보며 거니는 성벽 등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사는 보령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들입니다.
6. 이제 전국 지방 동시선거도 끝나고 지자체장도 결정되면서, 잠시 멈췄거나 느려졌던 일들이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도시재생에도 공동선이 작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동선은 구성원들이 서로 삶을 존중하고 희망을 나누며 연대할 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경제만 매달린다면 최근에 일어난 임대료 문제 갈등으로 건물 주인을 망치로 폭행한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도시재생이나 마을 만들기에 우리가 끼어들 틈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함께 힘을 모은다면 작은 것부터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꼭 도시재생뿐이겠습니까? 우리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들 모두 제자리를 잘 잡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우리 모습도 즐거운 삶을 위해 다시 정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부디 이번 도시재생 사업 때문에 다음 정권에서 곤욕을 치르는 사람 없이 모든 일이 잘돼서 누군가가 내지른 도깨비불이 사람을 흔들고, 생각을 열고, 작은 노래 하나에 공감하고, 마을 길에서든지 도시 골목에서든지 상상의 불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