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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마을살이 기반농촌이야기 2017. 8. 10. 12:31
1. 프롤로그
지난여름, 충남 보령에서는 머드축제와 더불어 ‘보령해변시인학교’가 열렸습니다. 7월 22일(토)부터 23일(일)까지 시인학교에서 많은 시인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손해일, 문정희, 이재무, 이승하, 공광규 시인 등 대략 200여 명의 시인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이런 좋은 자리에 모인 시인들에게 커피 한 잔 나눠주고 싶어서 커피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바닷가 시인학교로 갔습니다. 가는 길은 참 더웠습니다. 올여름이 유난히도 더웠죠. 그래도 정성껏 커피를 나눠주면서 시인들의 영감을 얻고자 했는데, 즐거운 시간이 이어져서 그 자체가 영감이 되었습니다.
시인의 말을 들으면서, 요즘 제가 부쩍 관심을 두고 있는 마을과 문화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은 시와 같은 영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것을. 영감은 예민해서 상처도 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힘을 갖고 있다고. 그렇게 마을에 사는 어느 한 사람의 삶이 사실은 시라는 것을. 마을의 문화는 그렇게 만들어지고 이어지고 보인다는 것을요.
2. 마을과 문화
요즘 ‘마을 만들기’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아니,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11월 2일(목)부터 4일(토)까지 보령시에서 열리는 ‘제4회 마을 만들기 충남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았거든요. 꼭 제가 느끼는 것이 아니더라도 국가 차원에서, 농림축산식품부 차원에서 마을 만들기란 단어를 보편화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을은 본래 있는 것인데, 마을의 모습을 새롭게 꾸미고자 하는 표현이 마을 만들기란 단어를 끄집어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요즘 우리나라 농촌 마을에 대해 행정의 예산과 관심 및 지원, 주민의 의지와 학습 자세, 전문가의 경험과 역량 등 기본적인 것은 상당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잘 갖춰져 있다고 해도 진취적인 역동성이 부족하면 마을은 여러 문제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취적인 역동성을 끄집어내는 일은 마을 만들기, 혹은 마을살이에 있어서 늘 고민거리입니다. 그래서 패러다임 바꾸기 등이 동원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착된 패러다임 바꾸기는 또 하나의 패러다임을 쌓는 것에 불과하겠지요.
결국, 마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모습과 자원들을 주목해야 하는데, 이는 마을의 변화와 삶의 질을 높이는 밑바탕이기 때문입니다. 마을에 있어야 할 것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작은 학교도 살아남도록 해야 하고, 사람이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토대를 늘 만지고 보수해야 합니다. 솔직히 인위적 노력은 힘들어서 어렵습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즐거움이 수반되는 기반은 문화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을에서 문화란 거창한 것 같고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마을의 감성을 드러내고, 그 감성에 연결된 각각의 고리를 통해 마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가치를 누리는 일이 작은 의미에서 마을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문화란 인간이 사회를 통해, 또는 자연과 집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형성한 다양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뜻합니다. 마을 문화는 마을에서 이뤄지는 상호작용과 지적·예술적 활동을 통해 형성한 문화적 결과이지요.
요즘 농촌 마을에는 문화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실 마을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사람 사는 곳에 어찌 문화가 없을까요? 이런 생각에는 미디어의 영향으로 도시적인 것만을 문화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을 테고, 인구 감소로 말미암아 마을공동체가 위축되니 공동문화의 생산이 없어지는 탓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래 마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습 자체가 훌륭한 문화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면, 어렵지 않게 농촌에서 즐거운 마을살이를 할 수 있습니다.
3. 우리 동네 예술단
충남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 마을에는 70대 주민들로 이루어진 극단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우리 동네 예술단’인데요. 제석리 마을은 그동안 ‘서각’으로 잘 알려진 마을이기도 합니다. 마을 내에 서각체험교실이 있어서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와서 배우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제석리 마을의 우리 동네 예술단은 상설공연단은 아니지만, 보령시 연극 단체와 때로는 연대해서 무대에 서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 동네 예술단이 기회가 되는 대로 공연하는 것은 마을의 전설을 토대로 한 ‘경순왕의 깃발’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이 마을에서 어렵게 살던 어부가 바다에 갔다가 물결에 떠내려온 함을 주웠는데, 그 안에 신라의 제56대이자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을 기리는 깃발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깃발을 고이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꿈에 경순왕이 나타나서 어부에게 칭찬과 함께 복을 내렸습니다. 그날 이후로 어부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궁금한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부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경순왕의 사당을 지어 함께 모시자고 말했습니다. 어부는 욕심부리지 않고 그 말에 순순히 동의했고, 마을 사람들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십시일반 힘을 모아 경순왕 경모전을 지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을 전체가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내용인데,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각색하고 그것을 연극으로 만들었습니다. 연출자가 제일 고생한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사를 외우도록 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연극을 시작한 계기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한글 공부를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연극으로 한글을 배우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그런 과정에서 연극단이 만들어지고 온갖 정성을 들이니 당연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는 나를 위한 무대가 되었습니다.
동해의 경주와 서해의 보령은 동서로 떨어져 있지만, 의외로 보령에는 신라와 연결된 곳들이 제법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성주사지입니다. 또 경순왕과 연관된 곳으로 왕대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경순왕이 보령에 와서 앉은 자리에 생긴 절입니다. 제석리 사람들은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런 전설을 각색하고 연극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래 연극은 인간의 삶의 근원적 경험에 깊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제석리 사람들은 연극을 통해 함께 나누는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혼자 누리는 복보다 함께 누리는 복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을 연극은 공동체 연극입니다. 농촌에서 공동체 연극은 문화로부터 소외되었던 농민들이 연극을 통해 문화의 주체가 됨으로써 그들의 견해가 폭넓게 공유되는 현장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을 연극은 새로운 참여 방식을 보여줍니다. 우선 공연자와 관객이 통합되어 집단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잔치의 소통 방식을 보여줍니다. 제석리 마을 연극에서도 관객과 배우가 아주 잘 아는 사이여서 연극을 보면서 던지는 관객들의 추임새도 마치 훈련받은 모습처럼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재미가 배가되는 것이지요.
4. 마을의 변화를 이끄는 즐거움
원래 농촌은 공동체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서로의 행위를 이해하고,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통해 문화를 창출하고 재생산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문화의 힘이 지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하고, 마을을 지탱하게 했습니다. 연극을 통한 상상력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대안적 현실로 만들어 줍니다. 도피적 상상은 현실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공동체를 염두에 둔 상상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희망을 제시합니다. 상상력은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힘이고, 인간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과 상통합니다. 그래서 연극을 비롯한 예술은 아주 오래전부터 공동체의 집단의식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다른 세상을 이해하게 해 주는 도구였습니다.
농촌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불통 요소도 많습니다.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모였는데 마을 회의에서는 긍정보다 습관적으로 부정이 많은 경우도 봅니다. 부정의 논리가 명확한 것도 아닙니다. 잘 아는 것 같은데도 어긋나는 것은 오랫동안 같이 살아서일까요? 그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통하는 연습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막걸리 한 잔 나눠 마시는 유익함 못지않게 마을 연극 같은 집단적 문화예술 행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 행위로 이어지는 공동체 의식은 똑같은 것을 반복해도 늘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불통을 소통으로 바꿉니다. 소통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제석리 마을 사람들은 해가 갈수록 늙는다기보다 연륜이 더 쌓인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마을 전체를 문화의 터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5. 에필로그
마을에서 모든 것은 한 부분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을 한 귀퉁이의 들꽃도 잡초가 아니라 구성원으로 존재합니다. 모든 구성원은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나눌 수 있습니다. 별 볼 일 없게 보여도 함께 농촌의 감흥을 두드리고, 농촌에 깃들어 있는 문화를 끄집어내는 일이 마을의 본래의 건강한 모습을 유지케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을은 처음부터 자생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마을은 자연의 힘을 느끼며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함께 삶을 나누는 공동체의 터전으로 나타납니다. 마을의 가치를 키워내는 데는 미래를 예측하는 즐거운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상상력은 공룡도 뛰어놀게 합니다. 보령시 천북면 마을 바닷가에서 최근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공룡 발자국화석이 발견됐습니다. 충남에서 공룡 발자국화석이 최초로 발견된 이 지역은, 한반도의 공룡시대인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암층이 해안을 따라 분포된 지역입니다. 1억 년 전의 공룡이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습니다. 사진을 촬영하고 사진에 상상력을 집어넣어서 재미있는 공룡 마을 사진전도 열었습니다. 1억 년 전의 공룡이 말을 걸어온다는 상상 속에서, 사진을 보는 사람들 또한 공룡에 대한 상상을 최대한 할 수 있도록 작업을 한 것입니다. 1억 년 전의 공룡도 마을의 구성원이 될 수 있고 마을을 유쾌하게 할 수 있다면, 지금 함께 하는 모든 구성원의 가치는 그야말로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마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정부나 지자체가 진행한 마을 사업들은 다 나름의 목적과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기계적으로 쫓는 일이 잦다 보니 마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즐거움과 문화는 장식물처럼 취급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즐거움이 없는 마을 만들기는 개인주의를 부추기며 공동체를 해체하는 주범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을의 상상력의 보고인 이야기와 노래, 그리고 그 땅을 딛고 산 이들의 숨결과 역사가 스며있는 먹을거리와 삶의 터전에 대한 애틋한 마음들이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문화는 기억을 공유합니다. 기억이 함께 공유되지 않는 행복이란 무너질 수 있는 불안을 늘 느끼고 있습니다. 마을 입구마다 있었던 마을 나무는 공동체의 기억을 듬뿍 안고 있다가 틈만 나면 마을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길을 넓히면서 나무들은 뽑혀 나갔고 기억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마을의 모습을 찾는 것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공유하는 기억과 행복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 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을의 본래의 모습을 기억하도록 돕고,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문화적 전환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문화는 즐거운 마을살이의 기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