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에 맞춰서 네 사람의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한 사람의 팔이 움직이듯이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모습 속에서 가슴을 파고드는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모두 충격을 받은 듯 눈이 커지고, 입가에서 작은 탄성이 새 나왔습니다. 젊은이들이 조직한 사중주단 ‘Quartet Griot’가 첫 번째 곡으로 연주한 쇼팽의 ‘녹턴 제20번 c-sharp 단조 작품 72번의 2(유작)’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올여름은 무척 덥기도 했지만, 모처럼 음악을 비롯한 공연 예술의 진수를 만끽한 계절이기도 했습니다. 열린 무대, 가까이 다가선 연주는 무심한 마음을 일깨우고 내 안에 멋진 울림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세상은 이렇게 여전한 감동의 선율이 흐르고 나눔의 마음들이 있어서 스스로 위로를 얻는구나.’
올여름에 제가 만난 나눔의 공연들입니다.
음악가 박창수 씨에 의해 2002년 7월부터 박창수 씨의 집에서 공연을 시작한 하우스콘서트는 10주년을 맞은 올해,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콘서트를 마련하였습니다. 다양한 음악 장르를 가진 뛰어난 연주자들과 설렘을 가진 관객들이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바닥에 앉아서 연주자는 관객의 기대와 시선을, 관객은 연주자의 숨소리와 손가락 떨림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보령에도 찾아온 하우스콘서트 공연에서 저를 포함한 관객들은(비록 많은 수가 아니었지만) 객석을 비워두고 무대 위에서 연주자들 바로 앞에 앉아 연주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쇼팽의 곡을 기타 연주로 듣기도 하고, 푸치니의 노래도 듣고, 햄릿의 읊조림도 들었습니다. 함께 바닥에 앉아서 악기의 울림을 몸으로 느끼고, 공연 중간에 배우와 함께 쉬기도 한 하우스콘서트는 농촌에서 겪는 색다른 경험과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나눔을 위해서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준 이들의 모습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복권위원회가 후원한 타악기그룹 ‘얼쑤’의 공연은 사실 제가 신청한 공연이었습니다. 문화 나눔의 하나로 농촌을 찾아가는 공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신청을 했는데, 다행히 일찍 선정되었고 첫 공연이 낙동초등학교에서 이뤄졌습니다. 지역주민도 초청해서 전문공연단이 들려주는 멋진 타악기의 흥겨움에 함께 심취하고, 유명한 피자를 만드는 기업에서 피자를 즉석에서 만드는 차량도 보내줘서 더불어 피자 맛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와서 덥고 힘들었지만, 땀방울 하나하나를 오히려 즐기는 연주자들을 보면서 정말 소리를 통해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느꼈고, 무대와 객석을 한 마당으로 만들어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가 멋진 연주였습니다. 마당에 함께 한 우리는 관람객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연주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 젊은 연주자들의 모습은 우리 농촌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지혜와 생기였습니다.
이렇게 담을 허물고 함께 무대에 서고, 공연과 연주를 소유하지 않고 나눔으로 여기는 연주자들을 이번에는 산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더위를 피해 찾아간 보령 옥마산 정자에서는 색소폰 연주자들과 국악인의 공연 연습이 흥겹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보령의 머드축제 때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공연할 내용을 날씨도 덥고 해서 산마루에 올라와 연습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감미로운 색소폰 연주와 국악인의 창과 춤은 뜻밖에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 분위기에 취해 있는데, 노래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회자의 말에 제가 노래 한 곡을 뽑았습니다. 살랑거리는 신록의 산바람과 색소폰 반주를 들으며 노래하는 기분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음향(音響)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산 위의 연주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음악을 나누고 삶을 나누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보령 머드축제의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볕더위가 기세를 떨친 여름이었지만, 오히려 그 뙤약볕 아래서 농촌을 위해 무대를 마련한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요즘 농촌봉사활동을 오는 청년들을 보면 그래도 희망을 보는 것 같습니다. 비록 단기 봉사활동이지만 나이 많은 농민들에겐 힘이 되고, 또 농촌을 몰랐던 청년들에겐 농촌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에 보령 천북의 빙도(氷島) 마을에서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농촌봉사활동을 하면서 농민들을 위해 갯벌 문화공연을 벌였습니다.
백제 시대 평민으로 당시 왕이었던 개루왕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남편을 따랐던 도미부인 설화의 고장인 빙도는 원래 섬이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여서 나룻배 대신 자동차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아담한 마을에는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갯벌 마른 땅에는 섬의 향취가 깃들어 있습니다.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갯벌 마당에서 펼쳐진 공연은 그야말로 청년들의 열정과 땀방울이었습니다. 드넓은 갯벌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함께 공연을 보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왕으로 불리는 사람도, 평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함께 무대를 만들고, 서로의 숨결을 들으며 건강한 삶을 노래하고 춤을 추고, 언젠가 공연이 마쳐질 때 서로에게 지금까지 즐거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올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볕더위는 무자비한 폭력이었다고 합니다. 고통받는 여름이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더워도 우리가 다른 무대에 있다면 고통은 내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소유로만 여긴다면 우리의 무대는 하나가 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돌아보면 자기 무대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갇힌 무대에서 어떤 연주가 사람의 마음을 당길 수 있을까요?
올여름에 만난 연주자와 여러 공연의 모습을 다시 떠올립니다. 스스로 무대와 객석을 허물고 함께 연주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였던 그들. 돌아보니 그들에게서 받은 선물이 크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선물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해서 다시 새로운 시간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들과 함께 길 위에 선 새로운 이들이 삶을 나눌 무대를 다시 정리하고 서로 위로해 줄 시간을 준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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