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이제 꼭 30년입니다. 충남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에서 산지가. 신죽리는 전형적인 충남 농촌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눈에 보이는 집들이 띄엄띄엄 있습니다. 이곳에 목회자로 와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공동체 삶에 조금씩 눈을 떴습니다. 처음엔 이곳이 얼마나 농촌인지도 몰랐습니다. 시간은 참 빠릅니다. 이제 60대 중반이 되었으니… 내 고향은 전남 목포, 아내는 경북 안동이고 이렇게 충남에서 살고 있으니 그런대로 우리나라 지역도 아우르며 사는 셈입니다.
여전히 신죽리 마을에서 목회를 하지만, 그동안 여기에서 목회하는 일로 여러 가지 일이 이어졌습니다. 신죽리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렇게 저렇게 사는 일이 알려지면서 보령시 ‘마을 만들기’ 일에 참여하고 있고, 충남 농촌 마을을 아우르는 ‘충남 마을 만들기 대회’ 조직위원장도 했습니다. 천북면에서 벌인 축제라든지, 또는 경제적 수익 창출 등으로 인해 여러 마을에서 마을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사는 문제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서로 배우고, 먼저 간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은 늘 필요합니다.
2. 건강한 마을은 마을의 각 부분이 건강해야 합니다. 어느 한 부분이 약하면 전체가 약해집니다. 마을 학교가 아이들이 없어서 폐교 위기에 처하면 마을공동체도 흔들립니다. 부녀회 내에 갈등이 일어나면 마을은 우울합니다. 어느 한 집이라도 우환이 생기면 남의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각 부분이 건강하게 자기 자리를 잘 지탱하면 전체가 건강합니다. 마을 속 교회도 건강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마을이 이질감을 느끼도록 만들지 않았습니다. 마을의 희망을 하나님 나라에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마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마을 공동체 또한 세계를 이루는 부분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을공동체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같이 어울려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역할 또한 각자의 처지에서 하나님 나라를 함께 걷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희로애락을 나누고 그 속에서 영혼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각자 다르지만, 어울려 살면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신죽리 마을에 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술을 마시면 노래 한 곡 부르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힘든 농사에 술 한 잔과 노래 한 곡은 약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는 술을 마시면 교회로 왔습니다. “술 마시면 다른 데 가지 말고 교회로 오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봅니다. 수줍은 사람이었지만, 술 한 잔 들어가면 마음을 열었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임재를 나름대로 그렇게 경험(?)한 것 같습니다. 교회에 오면 서재에서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불렀습니다. 기타로 뽕짝 반주를 하면서 같이 웃었습니다. ‘일편단심’이 한 마음이 되고, 그는 교회의 수줍은 장로가 되었습니다. 마을에서 농사 경험을 나누는 데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3. 2017년에 '자랑스러운 충남인' 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마을에서 작은 활동을 하는 정도였는데, 마을공동체와 어울려 사는 것이 귀감(?)이 된다고 충남도에서 상을 준 것입니다. 특히 어울려 사는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폐교 위기에 처한 마을 학교 살리기에 나선 일입니다.
2006년 말에 마을 학교인 낙동초등학교가 입학생 부족으로 통폐합 대상 학교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학교 운영은 기본적인 일 외에는 멈췄습니다. 학부모회와 마을 주민들의 요청으로 교회에서 하던 마을 공부방을 학교로 옮겨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전환했습니다. 마을 사람인 교우들이 방과 후 프로그램 강사로 가서 영어, 한문, 피아노, 컴퓨터 등을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아내는 피아노 전공으로 신죽리 마을에 올 때부터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이때부터 지금까지 학교에서 음악 선생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부모들 요청과 입학생 확보 차원에서 멀리 있는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오기 위해 13년여 동안 등하교 차량을 운행했습니다. 16km의 거리를 하루 두 번 왕복하니 날마다 64km를 운전했습니다. 언젠가부터 토요일이 휴무일이 되었는데,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학교가 정상화되고 교육청의 지원을 받게 돼서 차량 운행을 하지 않습니다.
마을 학교에 관여하면서 슬픈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2009년에 2학년 수빈이가 길 건너 밭에서 일하던 엄마에게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일이었고, 또 하나는 낙동초등학교 총동창회 이종철 회장이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오다가 당한 교통사고였습니다.
2009년에 낙동초등학교가 KBS 다큐멘터리 ‘천상의 수업’ 대상 학교로 선정돼서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오닐과 아이들이 합창단을 만드는 과정을 두 달 넘게 촬영했습니다. 아이들은 엉겁결에 모두 합창단이 되어야 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촬영이 결정되기 두 달 전쯤 수빈이가 교통사고로 운명했고, 아이들의 슬픈 배웅 속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날 밤, 너무도 애잔해서 유튜브로 추모 음악을 찾다가 우연히 용재오닐이 연주한 ‘섬집아기’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용재오닐과 우리 아이들이 수빈이를 추모하며 ‘섬집아기’를 같이 부를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용재오닐이 진짜로 낙동초등학교에 나타난 것입니다.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났습니다. 합창단 첫 공연 리플렛에 이런 마음을 담은 초대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첫 연주곡은 당연히 ‘섬집아기’였습니다.
총동창회 이종철 회장은 십여 년 전, 당시 60대 중반으로 나름대로 사업도 잘하고 있었는데, 제가 아이들 통학 차량을 운행하자 늘 미안해하더니 본인도 어느 틈에 대형 면허를 따서 동창회가 마련한 25인승 버스로 운행 구역을 나눠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제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면서 열심히 차량 운행 봉사를 했는데, 2012년 4월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오다가 그만 덤프트럭에 밀려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망연한 마음에 처음으로 49재에도 참석했습니다. 비통한 영혼을 위로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있음을 위로받는 자리였습니다.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학교 교정에 직접 추모 글을 쓰고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보고 싶고, 가족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이 있습니다.
4. 마을에서 살면서 깨달은 것은 마을에서 더불어 사는 모든 일이 농업의 범주에 든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농업이란 단지 농사짓는 것만이 아닙니다. 마을에 농부만 있어서는 살 수 없습니다. 농업을 이루는 공동체는 어느 정도 삶이 연결된 구성원이 있어야 합니다. 미장원도 있어야 하고,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원도 있어야 하고, 식당도 있어야 하고, 작으나마 생필품 가게도 있어야 합니다. 학교는 당연하고, 교회도 건강하게 있어야 합니다. 정부 지원 사업을 의논할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을공동체에 애정이 있어서 같이 살면서 손을 맞잡고 마을 구석구석 놀러 갈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농촌에서 이루어지는 문화도 농업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 모든 것이 농업을 이루고 공동체 터전을 만듭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마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모습과 자원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 마을에 있어야 할 것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작은 학교라도 살아남도록 해야 하고,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토대는 늘 만지고 보수해야 합니다. 고령화된 마을에서 인위적 노력은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자연스러우면서도 즐겁게 할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동력은 문화의 힘입니다. 마을에서 문화란 거창한 것 같고 이런저런 것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마을의 감성을 드러내고, 그 감성에 연결된 각각의 고리를 통해 마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가치를 누리는 일이 작은 의미에서 마을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문화란 인간이 사회를 통해, 또는 자연과 집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형성한 다양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뜻합니다. 마을문화는 마을에서 이뤄지는 상호작용과 예술적 활동을 통해 형성한 문화적 결과입니다.
농촌에 오니 함께 할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1994년에 빔프로젝터를 구입했습니다. 무려 30여 년 전입니다. 600안시짜리였는데, 중고로 550만 원을 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배짱(?)을 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교회 공간을 마을극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광천읍 시장 가게에서 천으로 200인치 스크린을 만들어서 벽에 걸었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새로 나온 비디오를 대여해 영화 홍보를 했습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나름대로 문화를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오자 마을 모습과 마을 곳곳에 핀 꽃을 찍었습니다. 그 또한 틈나는 대로 빔프로젝트로 같이 봤습니다. 마을 꽃을 찍고 마을 모습을 찍다 보니 농촌 자체가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문화를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꽃 사진을 찍으면서 천대받는 풀, 보통 잡초라고 불리는 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선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이 놀라웠고 또 보면 볼수록 잡초의 꽃이 예뻤습니다. 잡초의 꽃은 대체로 크기가 작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적응하며 번지는 속도는 빨라서 성가신 애물단지로 여기기 때문에 농민들은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은 장소에 자리를 잘못 잡은 풀로 여깁니다. 경제성 있는 작물과 상반되는 잡초는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농촌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잡초를 사진에 담아보면 그 모습이 뚜렷합니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생명의 충만함이 있고, 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서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사진으로 달개비(닭의장풀)의 멋진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이 오히려 묻습니다. ‘이게 무슨 꽃이냐?’고. 달개비라고 말해주니 잘 아는 이름에 멋쩍어하면서도 감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달개비를 함부로 없애서는 안 되겠다는 말도 합니다. 더불어 사는 것을 인정합니다.
5. 저는 중학교 때, 아버지로부터 당시 성음사에서 나온 LP판 클래식 전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듣는 일도 어려웠지만, 해설서를 보며 차근차근 듣다 보니 클래식 음악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지금도 피곤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듣고 싶은 음악을 찾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전축 바늘을 사러 레코드점에 자주 갔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도 전축 바늘이 잘 고장 났을까요? 낙동초등학교 아이들이 KBS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합창으로 용재오닐 비올라와 협연을 했습니다. 저도 그때 서야 비올라와 바이올린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눈에는 모두 바이올린이었습니다. 듣기가 무척 좋아서 마을에서 결정한 것이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선물로 주기로 한 일입니다. 이미 학교에서 합창단 활동을 하고 있고, 피아노도 배우고 있는 아이들이 바이올린도 배우자 자연스럽게 작은 오케스트라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전축 바늘을 다시 사러 가는 떨림이 일어났고, 마을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꿈을 가졌습니다.
마을에서 나이를 불문하고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플롯, 피아노 등 악기를 배우도록 권유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것은 장애물은 아니었습니다. 71세에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고, 68세에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배우면서도 이런 악기는 TV에서나 보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몇 분은 악기 배우는 일이 어렵다고 도중에 그만두기도 했지만, 대체로 의욕을 가지고 잘 따라왔습니다. 누구나 어릴 때부터 갖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이 악기 연주로 나타났습니다. 마치 아이들처럼 차근차근 꿈을 키웠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장을 맡은 나창근 씨는 귀촌했는데, 굴지의 회사에서 상임이사와 사장을 역임한 분입니다. 귀촌 후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군산에 있는 2년제 대학 음악과에 입학하기를 권유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지만, 마을에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보자는 말에 차츰 관심을 보이다가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보령에서 군산으로 색소폰 전공으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졸업하니 음악 하기에 딱 좋은 나이 70세였습니다. 2023년은 75세가 되는 해입니다.
매주 화요일마다 저녁에 모여서 연습하는데, 연습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배부릅니다. 꿈을 꾸었던 낙동초등학교 아이들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70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우리가 사는 마을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연주회였습니다. 많은 사람의 큰 박수는 모두가 함께 바라보는 희망의 신호가 되었습니다. 오케스트라 연습실도 보령시 문화예술 공간 지원 사업 공모에 선정돼서 신죽리수목원 내에 마련했습니다.
마을에는 생각보다 불통 요소가 많습니다.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모였는데 마을 회의 모습은 긍정보다 습관적으로 부정이 많은 경우도 봅니다. 부정의 논리가 명확한 것도 아닙니다. 잘 아는 것 같은데도 어긋나는 것은 오랫동안 같이 살아서일까요? 어떻게 보면 소통하는 연습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막걸리 한 잔 나눠 마시는 유익함 못지않게 마을 안에서 함께 하는 문화 행위는 필요합니다. 문화 행위는 똑같은 것을 반복해도 늘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더불어 사는 길을 열어줍니다.
6. 코로나19를 3년 가까이 겪다 보니 마을은 위축됩니다. 고령화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늘면서 마을회관도 예전 같지 않고 조용합니다. 마을을 보며 목회자로서 여러 생각을 합니다. 조금씩 생각을 바꿔보기로 합니다. 앞으로 마을이 어떻게 될지 전문가들의 예측은 계속 나오지만, 마을에서 30년을 살아 온 마을 전문가(?) 입장에서는 농촌의 위기와 새로운 생명 시대로 나가는 기회를 연결해 보려고 합니다. 사실 그동안 마을에서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통해 마을 사람들과 소통한 것은 상상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사는 천북면 바닷가 작은 섬에서 최근 대략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됐습니다. 충남에서 공룡 발자국 화석이 최초로 발견된 이 지역은, 한반도의 공룡시대인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암층이 해안을 따라 분포된 곳입니다. 섬 사진을 촬영하고 사진에 상상력을 집어넣어서 재미있는 공룡 마을 사진전도 열었습니다. 1억 년 전의 공룡이 말을 걸어온다는 상상 속에서, 사진을 보는 사람들 또한 공룡에 대한 상상을 최대한 할 수 있도록 사진 작업을 했습니다. 1억 년 전의 공룡도 여전히 마을의 구성원입니다. 마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마을에 썩 잘 어울립니다.
마을은 위축될수록 더욱더 더불어 살아야 할 곳입니다. 마을 안에서 재미있는 상상을 들출 필요가 있습니다. 희망은 상상하는 마을에 있습니다. 마을을 이루는 각 부분이 다시 한번 새롭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마음을 모으고, 상상의 힘을 키우겠습니다. 2023년입니다. 다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할 새로운 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