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대도시를 제외한 지역, 특히 농촌(농산어촌 포함하는 말) 지역에 소멸이라는 단어가 붙은 지 제법 됩니다. 농촌에서 살다 보니 소멸이 피부에 와 닿는 속도가 확확 느껴집니다. 정말 소멸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국가, 지역, 마을이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곳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농촌 소멸이 단지 농촌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사람의 몸은 새끼손가락만 아파도 힘을 쓰기 어렵습니다. 새끼손가락이 나하고 상관없다고 할 수 없지요.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를 흔들고 삶의 불안을 키웁니다. 요즘 기후 위기가 현실이 되는 모습은 모든 일이 나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촌이 그렇습니다.
농촌의 공익적 가치는 우리 삶의 기반입니다. 돈 되는 농업은 우리 건강을 상업화시킵니다. 골고루 먹어야 건강을 지키는데, 골고루 농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농사짓는 사람들이 농촌에 있어야 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을 지탱하는 마을가게, 미용실, 식당, 정육점, 의원, 약국, 카센터, 철물점, 회관, 학교 등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곳곳이 소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소멸의 시간을 늦출까. 또 회복하는 길은 없을까.
여러 방안이 나오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소득을 얻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소득이 있어야 생활을 하고 미래를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농촌에서 필요한 만큼 소득을 얻기는 쉽지 않지만, 기본적인 소득을 갖게 해주는 일은 사회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생각이 있어서 갑론을박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모든 생각을 꺼내서 공론화하고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글은 그런 생각의 하나로 농촌기본소득에 대해 이야기를 모아봅니다.
2. 천북농협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조합장실에서 최근 제가 사는 마을의 나이 많은 주민 한 분이 설날 무렵에 TV를 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혼자 생각대로 자주 움직이는 분이라서 이웃을 조금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어려우면 어렵다는 내색도 해서 같이 붙어사는 정으로 이웃의 도움을 받곤 하지요. TV가 속을 썩이는지 그동안 틈틈이 어디서 오래된 TV를 몇 대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끙끙대며 가지고 왔어도 화면 상태는 영 신통찮았던 가 봅니다. 그러다가 마음먹고 이번에 새 TV를 들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샀는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작년 한 해 동안 충남에서 지원한 농어민수당을 모아서 샀다고 합니다. 농어민수당이 농민에게 문화 복지 혜택(?)을 준 것이지요. 그동안 TV 때문에 같이 불편했다는(?) 이웃들도 축하해 주고, 듣는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2020년부터 시작한 충남 농어민수당은 2021년에 가구당 80만 원을 연 2회 분할로 지급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농민수당, 또는 농민공익수당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무튼, 작년 기준 충남 지원금이 제일 많았습니다.
농업은 국민의 기본적인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래서 각 지자체에서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고, 도시와 소득 격차를 줄여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를 방지하고, 농민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기 위해 지급하는 수당을 농민수당이라고 합니다. 보통 농민수당은 농업경영체 등록한 경영주만 신청할 수 있고, 신청 연도 1월 1일을 기준으로 전년도 해당 지역에서 1년 이상 거주하고 1년 이상 계속해서 농업경영체 등록이 되어 있어야 신청 할 수 있습니다.
농민수당은 2018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각 지자체에서 조례 제정 운동이 본격화되었고, 2019년 전남 해남군이 처음 농민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으로 확산하였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광역-기초지자체가 매칭 방식으로 가구당 ‘연 60만 원’ 정도의 농민수당을 지급 중입니다.
3. 농민수당과 농사 직불금이라고 불리는 공익 직불금은 제시된 조건을 충족한 농민들을 위한 지원정책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공익 직불금의 경우에는 정부에서 농민에게 지원하는 지원금이고, 농민수당은 각 지자체에서 지급하는 지원금이기 때문에 지급조건이나 지급 방식 및 금액 등에 있어 지자체별로 조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충남의 경우, 2022년부터는 농어민수당을 상반기에 모두 지급하고, 수당도 가구원 수에 따라 개인별 차등을 두는 것으로 개선됩니다. 1인 가구는 연 80만 원, 2인 가구는 1인당 45만 원씩, 3인 가구는 1인당 40만 원씩, 4인 가구는 1인당 35만 원씩 지급할 계획입니다. 이럴 경우 4인 가구는 연 140만 원을 받게 됩니다. 소요 예산은 1,320억 원에서 1,448억 원으로 128억 원(도비 51억 원, 시군 77억 원)이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상자도 지난해 16만 가구에서 올해 약 25만 명으로 늘어나고요.
그러다 보니까 농어민수당 지급방식 개선과 관련 일부 시군은 재정 부담이 매우 증가한다며 분담률 조정을 도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농어민수당 지급은 도에서 주도하고 시군에 요청한 사업인 만큼 지급방식이 개선될 경우 재정 분담률도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현재 충남도와 시군 간 분담률은 4:6입니다.
그렇다면 농민만 수당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사는 농촌 공동체 지속과 활력을 위해 농촌기본소득 차원에서 농촌 공동체 구성원도 모두 수당을 받을 수 없을까요? 여기에 대해 제가 사는 충남의 양승조 도지사는 일단 부정적입니다. 얼마 전 간담회를 통해서 대화를 나누어보니, 농어민수당은 이미 전국에서 충남이 가장 많이 주고 있다면서 농촌기본소득은 그렇게 효과가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차라리 그 예산이면 청년 주택을 지어서 공급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청년 주택이 농촌 곳곳에 들어설 수는 없지요. 충남에서도 대도시 주변 정도에 가능하다 보니 청년 주택이 충남의 기반인 농촌 소멸을 막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농촌은 선거에서 도지사에게 도움을 주는 표도 아주 적다고 생각해보고요.
4. 농촌기본소득은 ‘농촌 지역’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직업이 농민인 경우에만 지급하는 농민수당(농민기본소득)과 다릅니다. 농촌기본소득은 도·농간 격차 해소와 인구 유입을 통한 국토 균형 발전의 수단으로, 또 농촌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제기됐습니다. 소득, 자산, 노동 유무와 상관없이 농촌 지역 모든 주민에게 정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정책입니다.
작년 말에 뉴스에 나와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이 ‘경기도 농촌기본소득 시범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었습니다. 시범사업 대상지 1차 심사를 통과한 가평군 북면, 여주시 삼북면, 연천군 청산면, 파주시 파평면 등 4곳을 대상으로 무작위 추첨을 했는데, 그중 청산면이 선정되었습니다. 청산면은 2021년 11월 말 기준 외국인 포함 3,880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2022년 3월 말부터 모든 주민에게 매달 1인당 15만 원씩 지역화폐를 5년 동안 지급하는데, 다만 농민기본소득과 청년기본소득을 받는 주민은 중복 수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업비는 63억2천700만 원이 편성됐으며, 경기도와 연천군이 7:3 비율로 분담한다는군요. 그리고 시범사업 지역과 비교 분석할 지역으로 안성시 삼죽면을 선정했고요. 시범지역과 비교지역의 노동·교육·여가·건강 등 생활실태를 파악, 농촌기본소득이 경제생활과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비교 분석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할 예정입니다.
농촌기본소득 시범사업은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정책의 효과를 조사하는 사회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기도는 5년간 시범사업에서 효과가 입증될 경우 2단계 사업 대상을 26개 면으로 늘리고, 최종적으로는 도내 101개 전체 면 지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습니다.
5. 지난 2010년에 이명박 정부는 ‘농림수산식품·농산어촌 비전 2020’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3대 정책 미션의 하나로 ‘쾌적하고 활력이 넘치는 농산어촌’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사이에 많은 예산이 농촌에 투자되었고, 또 많은 인력이 관여하고 있지만, 농촌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현재의 농촌과 농업에 대한 정책이 근대화 과정에서 왜곡된 인식을 그대로 가져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생산주의 농정’이라 부르는데, 먹을거리의 대량생산과 안정된 공급을 기본으로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농촌이나 농민보다 도시 소비자를 위한 관점에서 정책이 만들어집니다. 농업이란 그냥 먹을거리 생산이고, 소비자 공급 산업일 뿐입니다. 농촌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마당일 뿐이고요. 농촌과 도시를 분리하면서 정작 소비지인 도시는 인구 과밀화로 신음하고 생산지인 농촌은 소멸당하고 있습니다. 농촌 곳곳이 수탈당하고 있다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요. 이제라도 국가가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농촌과 농업에 대한 새판을 짜야 합니다. 이것은 곧 도시를 위한 일이고 국가 전체를 위한 일입니다. 그 시급한 시도 중 하나가 농촌에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고, 농촌기본소득 시행이라고 여겨집니다.
3월 9일 20대 대통령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글을 쓰는 현재 농촌과 농민들은 농민기본소득, 농촌기본소득에 대한 각 당 후보들의 공약을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농민기본소득을 대선 공약화한 후보는 정의당 심상정 후보입니다. 지난해 11월 11일 농업인의 날을 맞아 농정공약을 발표하고, 모든 농어민에게 월 3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경기도지사 시절 ‘농민기본소득 지원 조례’와 ‘농촌기본소득 조례’를 통과시킨 바 있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1월 25일 '농어촌대전환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공약에는 소멸 위기의 농어촌을 균형 발전의 거점으로 삼고 1인당 100만 원의 농어촌기본소득을 지급해 도·농간 소득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내부적으로 ‘농민기본소득을 먼저 실시하고, 농촌기본소득은 시범 시행 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향’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6. 가장 큰 쟁점은 재원입니다. 농민기본소득의 경우 단순 계산으로 모든 농민(231만4000명, 2020 농림어업 총조사결과)에게 월 30만 원(연간 360만 원)씩 지급할 경우 연간 8조3304억 원이 필요합니다. 올해 농식품부 총 지출예산 16조 8,767억 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입니다. 농민은 231만 명이지만, 행정구역상 농촌으로 분류되는 읍·면 지역 인구는 976만 명으로 농촌기본소득의 재원은 이보다 더 방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자신의 공약과 관련된 재원 마련에 대해 “이미 다 계산이 돼 있다”면서 “낭비적 예산을 줄이고, 농가당 지원되는 각종 농업보조금을 일부 전환하면 충분히 지급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농촌주민수당’ 지급을 주장하는 박진도 충남대 명예교수는 행정안전부의 인구감소지역 선정지표를 보완해 소멸위험 지역을 특정할 경우 농촌기본소득 대상 인구는 300만~50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밝혔습니다. 우선 300만 명에 월 30만 원씩 지급하는데 필요한 예산은 10조8000억 원인데, 박 교수는 농촌주민수당의 재원은 정부의 모든 부처와 지자체의 농촌(개발) 예산에서 조달하기 때문에 재원 조달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논란의 소지가 큰 것도 현실입니다. 대체로 “불필요한 투입재 보조나 농촌개발 예산의 구조조정엔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지만, 수조 원의 막대한 재정이 수반되는 공약이라는 점에서 과연 현실화가 가능할지 의구심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 충분한 논의와 공론화 과정이 선행되지 않은 가운데, 재원 마련을 위한 농정예산 구조조정부터 언급되고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농촌의 한 활동가는 “우리나라 농촌과 농민, 그리고 농업이 어떤 방식으로 가야 할지 기본전략이 제시되고, 그 정책에 따라서 농민이나 농촌기본소득의 방향과 재원 조달계획이 논의되어야 하는데 선후가 바뀌다 보니 농촌기본소득 도입에 맞춰 재원을 어떻게 확충할 건지만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충분히 지적할 수 있고 우려할 만한 말입니다. 그런데도 농촌 회생을 위해 시급하게 먼저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소멸의 바람이 따갑습니다.
7. 물에 빠져 의식을 잃은 사람을 건져내면 전후 이유 불문하고 우선 인공호흡부터 합니다. 사람을 살려내야 모든 것이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사람이 살아야 하니까요.
기후 위기 대처에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것만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할 수 있는 것도 놓칩니다.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해야 할 노력은 나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국제 규약도 만들었고 각 나라가 해야 할 개별국가 기후 행동도 있습니다. 기업들의 자발적인 재생에너지 약속을 뜻하는 RE100도 이번 대선 후보 간 토론을 통해 국민에게 잘 알려졌습니다. 여기서 시간이 더 지나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지고 회복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시간이 중요합니다. 기후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시간은 지금입니다.
지금 농촌은 진맥할 시간이 아니라 인공호흡부터 해야 할 시간입니다. 왜 의식을 잃어가고 있는지는 한숨 돌린 후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실 아는 것이긴 하지만요. 아무튼, 절박한 시간입니다. 농촌 지역 문화생태계에 대해서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로컬시대라고 해서 문화예술인들이 대도시보다 지방으로 오면 할 일이 많은데, 문제는 할 일을 함께할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작은 생태계라도 구성되면 도시보다 여유가 있어서 더욱더 재미있게 문화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데, 그 작은 구성이 어렵습니다. 문화예술뿐이겠습니까? 도시의 인구 과밀화로 인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 절감을 위해서, 국가의 건강한 균형 발전을 위해서 농촌에도 여러 생태계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늙은 농민의 등골이 휘어지지 않으면서 농촌의 공익적 가치가 지속하기 위해, 젊은 농민과 농촌 생태계를 지탱하는 여러 사람이 농촌에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 농민이 농사짓는 소명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며 음악도 듣고 그림도 감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사는 마음 나눔이 절실합니다. 농촌기본소득은 농촌만이 아닌 도시와 농촌이 함께 살아나는 마중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