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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서

마을여행 들꽃마당 2020. 10. 12. 23:27


1. 30여 년 전, 농촌에 처음 왔을 때, 그때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인사하며 자주 보니 알게 되고, 이런저런 길도 아침저녁 다니면서 알게 되었는데, 주변의 풀과 꽃은 도무지 알 수 없더군요. 잡초라고 이야기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지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 모른다는 것이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손에 쥘만한 디지털카메라 한 대 사서 주변 풀과 꽃을 찍었습니다. 꽃 모습을 외우고 풀 모습 특징을 새기고 이름을 적고, 때로는 인화해서 머리맡에 붙여두었습니다.


이름을 알기 시작하니 세상이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안다는 것이 참 이상하더군요. 뭔가 풍성해진 느낌이랄까. 꽃밭을 만들면서 바닷가 석축 근처 버려진 돌을 주워다가 흙더미 쌓은 주위에 둘렀습니다. 자연스럽게 경계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경계 안에 꽃을 심었고 경계 밖으로 나온 꽃들은 가볍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이름을 알고 나니 경계가 무의미해졌습니다. 풍성해진 이름들이 애초에 없던 경계를 지나서 자유롭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 이름을 알게 되니 왠지 모를 경계도 사라졌습니다. 풀로 자랄 때도 눈 한 번 더 주고, 꽃으로 피어나니 발걸음이 그 곁을 맴돌았습니다. 꽃과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을 땐 바람에게 조금만 기다렸다가 지나가기를 부탁했습니다. 모를 때는 모른다는 것 그것이 경계가 되었는데, 이름을 알게 되니까 아는 것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정말 뽑을 풀이 없더군요.

안도현 시인의 신작((新作) ‘꽃밭의 경계’를 읽었습니다. "꽃밭에 심을 것들을 궁리하는 일보다 꽃밭의 경계를 먼저 생각하고 돌의 크기와 모양새부터 가늠하는 내 심사가 한심했어라 (중략) …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경계를 짓고 여기와 여기 아닌 것들의 경계를 가르는 일을 돌로 누를 줄 모르고 살아왔어라"
귀향 후 새로 지은 집에 꽃밭을 일구고자 그 테두리에 놓을 돌을 주우러 다닌 일을 그렸습니다. 꽃밭이라는 경계의 안과 밖에서 시인이 깨닫고 돌아본 것은 경계를 짓고 경계를 가르는 일을 나도 모르게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었습니다.


3. 올여름에도 이곳저곳에 달개비라고 하는 닭의장풀이 피었습니다. 닭의장풀이 서재 가까이 자리를 잡은 지는 오래입니다. 밭두렁이나 길섶에서 스스럼없이 영역을 넓혀가는 풀입니다. 닭의장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꽃의 생긴 모양이 벼슬을 단 닭의 머리 모양을 닮은 듯한데, 그 하늘색 꽃잎은 한여름의 푸르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잡초로 천시하는 이 풀을, 당나라 시인 두보는 수반에 꽂아두고 ‘꽃을 피우는 대나무’라 하여 즐겨 보았다는군요. 사실 잡초라고 하면 농민들 입장에선 여간 귀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농작물이 잡초와 공존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농사짓는데 잡초와 싸움만 없다면 농사도 할 만하다고 여러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변산반도 농사꾼 윤구병 선생 말대로 만일에 잡초라고 여겼던 것이 농사의 훼방꾼이 아니라 자연이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땅에 뿌려준 고마운 먹이라면 어떨까요? 따로 가꾸지 않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약초나 나물의 일종이라면…. 닭의장풀은 예로부터 민간에서는 몸에서 열이 날 때 열 내림 약으로 요긴하게 썼고, 꽃잎을 따서는 하늘색 물감으로 썼다고도 합니다.

4. 닭의장풀이 경계 너머에 있을 때는 잡초였습니다. 그 이름으로 들어가니 한 송이 꽃이고 함께 사는 공동체였습니다. 닭의장풀을 매크로 렌즈로 찍어서 큰 사진으로 전시를 했더니 마을 농부 한 분이 처음엔 무슨 꽃인지 몰라봤습니다. 닭의장풀이라고 일러주니 멋쩍어하면서 함부로 대하면 안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때론 닭의장풀이 귀찮은 존재로 여겨질 수 있지만, 함께 사는 공동체로 받아들인다면 푸른 꽃으로 위안을 얻을 수도 있고, 마지막 모습은 유용한 퇴비가 될 수 있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나는지 생각해 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닭의장풀을 본다면, 그야말로 들에 핀 저 풀들을 본다면 어루만지는 손길이 나와 똑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풀꽃과 경계를 넘어서면서 반갑게 친근해진 이름이 매발톱꽃입니다. 처음 매발톱꽃이란 이름을 알았을 땐 이름이 낯설기도 하고, 또 나름대로 화사한 모습에 설레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름이 부드러운 것은 아니잖아요. 찬찬히 매발톱꽃 모양새를 보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튼, 매발톱꽃은 여러해살이풀로서 양지바른 곳이면 잘 정착을 합니다. 유달리 변이종이 많은 매발톱꽃의 다양한 색깔은 참으로 매혹적입니다. 유럽에서는 실의에 빠진 사람이 매발톱꽃잎을 문지르면 샘물 같은 용기가 솟아난다는 전설도 있다는군요. 이름을 알고 경계가 무너지니, 보면 볼수록 서로 애틋한 감정을 주고받습니다. 작은 풀꽃을 통해 경계를 넘어서는 기쁨을 배웠습니다.


5. 코로나19(COVID-19) 시대를 지나면서 곳곳에 경계가 생기는 것을 봅니다.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깝게’라는 표어가 있는데, 사실 예전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지요. 그래서 요즘 몸은 멀어도 마음이 가까워지는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거리 두기를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경계만 강화하면 건널 수 없는 거리가 될 테니까요.

우리 사회에서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만드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일부라고 하지만 경계를 강화해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그런 노력이 건널 수 없는 거리를 만드는 패착을 둡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이 교회에 대해 안타까움을 내뱉는 목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사회에서 잡초 같다고 단정 짓고 솎아내야 한다고 규정하지 말고 그 속에 있는 생명을 끄집어내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질문을 종종 받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지면을 너무도 많이 차지해서 그냥 줄입니다.

제가 사는 보령에서 여성친화도시협의회 부위원장도 하고 있습니다. 협의회에 참가하면서 보령을 여성친화도시로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배우면서 깨달은 것은 여성의 관점에서 보는 일이 모든 사람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여성의 관점에서 보다 보니 많은 경계가 굳게 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성에 관한 것이냐 아니냐. 별로 의미가 없는 나눔입니다. 여성친화도시는 모든 사람이 관계하는 도시입니다. 특별히 여성을 우대할 필요 없이 함께 불편을 느끼고 경계 지어진 것을 헐어내면 모두가 평화롭게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경계를 가르는 일을 돌로 누를 줄 모르고 살아왔어라’라는 시인의 말을 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6. 그렇게 해서 아프리카 케냐 여성인 왕가리 마타이(1940년–2011년)를 알았습니다. 왕가리 마타이는 역사에 남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중 한 명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그녀는 언제나 ‘최초’라는 말이 앞에 붙었고, 여성으로 따라다니는 경계를 허물고 그렇게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우리 모두의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1940년 케냐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왕가리 마타이. 아프리카 사람들 대부분이 ‘여성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당시 열린 사고를 했던 부모님 덕분에 그녀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똑똑했던 그녀는 장학생으로 선발돼 독일과 미국에서 유학까지 했습니다. 미국에서 좋은 직장을 다닐 수 있었지만 망설임 없이 케냐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조국은 무분별한 개발로 사막화된 초원뿐이었습니다. 또 물건처럼 취급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나무 심기 운동인 ‘그린벨트 운동’과 함께 케냐의 성차별에 맞선 여성의 권리를 위한 운동을 펼쳤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케냐에서 여성이 중심이 돼 운동하는 건 매우 위험했습니다. 그녀를 향한 각종 테러와 폭행이 되풀이됐고, 정부 기관마저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하지만 어떤 제재와 탄압 속에서도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나무 심기 운동을 위한 후원자를 찾던 왕가리 마타이는 케냐 여성위원회에 도움을 청합니다. 하지만 여성운동과 관련이 없다며 경계를 긋고 거절하려던 여성위원회에 왕가리 마타이는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집안일에 매진해야 하는 케냐의 여성들에게 깨끗한 물과 땔감을 얻는 일, 자녀를 먹이고 가르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고민입니다. 이 고민은 모두 자연환경에 의해 좌우됩니다. 비가 오면 땅에 스며든 물을 나무뿌리가 흡수해 홍수를 막고, 땅이 메마른 날에는 물을 조금씩 보내줘 심한 가뭄을 막아줬습니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파괴로 숲과 나무가 사라지니 샘이 말라버려 여성들이 물과 땔감을 구하기 위해 수십km를 걸어가야만 합니다. 자연환경의 파괴가 여성들의 삶을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무차별적으로 베어내고 농사를 짓는 곳은 가뭄이 심하고, 이로 인해 가축은 풀을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한 일이 생기며, 비가 오는 날이면 홍수로 이어져 산기슭이 무너지고 길은 엉망진창이 되는 일상을 봐온 여성위원회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고난을 이겨내며 나무 심기를 독려하는 그녀의 그린벨트 운동은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졌고, 30년 동안 무려 3,5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의 수도 대폭 늘어났고 2002년엔 무려 98%의 지지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200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뒤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2011년 난소암으로 7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건물을 세우고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이 발전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왕가리 마타이. 나무를 심는 일, 여성의 힘을 덜어주는 일, 잡초라고 생각하지 않고 진지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우리 공동체 속에서 이뤄지면 환경과 함께 세계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습니다.


7. 곳곳에서 경계를 계속 지속하려는 이들과 싸우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치 꽃밭 안의 경계를 넘어 어느 곳이든지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한 사람들을 들자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성차별을 용인하는 법과 소수자를 향한 편견에 단호하게 반대하며,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를 만들기에 힘쓴 미국의 여성 대법관입니다. 지난 9월 18일, 87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1993년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명해 연방대법관이 된 후, 27년간 미국 연방대법관으로 일하며 양성평등·장애인·환경문제 등에서 진보적인 판결로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여러 법률 제안 가운데 2009년 1월 29일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법안으로 서명하면서 발효된 오바마의 서명 1호 법률이 긴즈버그의 소수의견을 따른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이라는 것은 유명한 사례로, 긴즈버그가 미국에서 양성평등과 소수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변화를 끌어낸 것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하고 있습니다.

비록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반대의견을 낼 때 서두에 쓰던 '나는 반대한다(I disagree)'는 말로 차별적인 세상에 맞서고 굳건한 경계의 벽을 차근차근 헐어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오늘도 여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8. 세상을 달리 보는 일은 경계를 넘어설 때 가능합니다. 왕가리 마타이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그리고 꽃이 꽃밭 경계 안에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 우리도 그렇습니다. 잡초를 마냥 잡초로 보지 않고 그 이름을 알고 함께 공동체가 되는 삶을 산다면 날마다 새로운 세상을 맞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 시대를 살면서 문자에 확진자 소식이 담겨 올 때마다 더욱더 주위를 경계하며 너와 나를 나누려고 하면, 샘이 마른 땅처럼 우리 주변은 황량해질 것입니다. 마음을 가깝게 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나누려는 시대에 경계를 넘는 삶이 필요합니다. 한 그루 나무를 심듯이 우리 삶이 어려운 시대를 위로하며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닭의장풀과 매발톱꽃이 건강해서 우리도 건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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