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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공기 300원농촌이야기 2018. 12. 13. 16:45
1. 긴 프롤로그
2018년 12월 1일,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전국농민대회가 열렸습니다. 농민대회 참석자들은 밥 한 공기 300원 보장과 쌀 목표가격 24만 원을 외쳤습니다. 농민의 생존권이 밥 한 공기 300원에 연결됐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쌀 목표가격(앞으로 5년간 변동직불금의 기준이 되는)을 19만6000원(80㎏당)으로 책정한 가운데, 농민들은 “밥 한 공기 300원을 80kg으로 환산한 쌀 목표가격 24만 원은 농민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라며 “껌 한 통, 커피 한 잔 가격보다 낮은 밥 한 공기 값이 최소한 300원은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018년 11월 통계청 통계를 보면, 산지 쌀값이 20kg에 4만8421원입니다. 5kg이면 1만2105원 수준입니다. 2017년과 단순 비교하면 쌀값은 많이 올랐습니다. 2017년 11월엔 쌀 20kg이 3만7753원이었습니다. 일부 언론과 소비자단체에선 문제를 제기합니다. "쌀값이 올라서 식당이 어렵다." "쌀값이 올라서 물가가 폭등한다."는 것입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가짜 뉴스도 나돕니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쌀을 몰래 퍼주는 바람에 쌀값이 폭등했다.'는 내용입니다.
농민들은 쌀값이 폭등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으로 떨어진 쌀값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사실 최근 4년간 쌀값은 꾸준히 하락했습니다. 2013년엔 쌀 20kg의 연평균 가격이 4만3815원이었습니다. 2015년엔 3만9579원, 2016년 3만4970원, 3만3772원까지 계속 떨어졌습니다. 그동안 공산품이나 공공요금의 가격 상승과 비교하면 농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큽니다.
박근혜 이명박 정권에서도 후보 시절에 농민 표 달라고 23만 원까지 쌀값 공약을 내기도 했습니다. 농민들의 간절한 바람이 밥 한 공기에 300원을 보장해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가계에 부담이 될까요? 서울에 간 김에 몇몇 사람들과 쌀값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렇게 쌀값이 올라가면 안 된다고 한결같이 말합니다. 쌀값이 올라가면 다른 물가도 올라가서 서민 삶이 팍팍해진다고요. 그런데 다른 물가가 올라가는 것이 과연 쌀값 때문인가요?
통계를 한 번 보시지요. 한국은행 통계자료에 나타난 쌀값 추이를 보면 80㎏ 쌀 한 가마 값이 1980년 4만7600여 원, 1990년 9만5100여 원, 2000년 16만5000여 원, 2010년 13만여 원, 그리고 2015년 15만9000여 원으로 나타납니다. 1996년 80㎏ 쌀 한 가마 값이 13만6713원이었는데, 2010년 쌀값을 보면 똑같습니다. 쌀값이 오랫동안 묶여 있었고, 이제 겨우 조금씩 자리를 찾는 중입니다. 이마저도 불안한 상태입니다.
1980년 국립대 1년 평균 등록금은 34만4000여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에는 418만여 원으로 12배가 올랐습니다. 38년 전에는 쌀 열 가마면 국립대학 1년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2015년 기준으로 서른 가마 이상을 팔아야 국립대 1년 등록금을 댈 수 있습니다. 사립대를 가르치려면 평균등록금 730만 원 기준이니 참 어려운 상황입니다.
쌀값은 농촌과 농민을 대하는 우리 모습입니다. 쌀의 적정가격은 대체 얼마일까요.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는 쉽지 않습니다. 농민의 입장과 거시적으로 산업 재조정과 국가 재정을 따지는 사람 간의 입장 차가 큽니다. 식량 안보 문제와 급격한 농촌의 고령화, 여기에 생활 보장 측면에서의 농가 소득 문제도 고려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식생활에서 쌀이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면 계산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흔한(?) 쌀밥은 논갈이와 건조 및 방아 찧는 과정을 제외하더라도 볍씨에서 이삭이 되어 수확하기까지 약 200일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한자 ‘쌀 미(米)’자는 ‘볍씨를 뿌려 거둘 때까지 농부의 88번 손길을 거쳐야 쌀 한 톨이 생산된다.’는 뜻으로 한자 八十八이 합쳐져서 글자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주식인 쌀은 농부의 손을 무수히 거쳐야 합니다. 손실만 나고 국가 재정에 하나도 이익이 되지 않는 천덕꾸러기 쌀이라면 아예 농사짓지 말고 전량을 수입해서 먹는 것은 어떨까요? 식량 주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2. 밥 한 공기 300원
“어제 오후에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오늘은 병원에서 마지막을 준비하시라고 했대요. 장례를 준비해야 하는데 어쩌죠?”
조금 다급하게 전화가 왔습니다. 홍성읍내에 있는 한 요양병원엘 서둘러 갔습니다. 올해 여든을 갓 넘긴 마을 분이 산소 호흡기를 입에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평생 농부로 살아오셨고, 예전엔 밭두둑이었던 땅을 북돋워 지은 집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렸는데 요양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마지막 시간을 맞고 있었습니다. 찬찬히 얼굴을 바라보니 예전에 농사를 짓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온종일 논에서 서성거리며 쏟아지는 햇볕을 듬뿍 안았던 그의 밥 한 공기는 300원을 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기어이 장례를 치르고 왔습니다. 12월 8일, 이곳은 첫눈이 내리고 무척 추웠습니다.)
사실 어느 나라 농민이든지(한국 농민이나 미국, 혹은 독일의 농민 또는 일본 농민이든지)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오늘 농업의 속성, 농부의 운명으로 보입니다. 죽어서까지 농부가 자랑스러운 나라는 얼마나 될까요? 그래도 농부들이 당당한 나라가 있긴 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으면 참 좋겠습니다만.
이를테면, 유럽연합(EU)의 농부들은 대체로 농가소득의 50~90%까지 직불금(국가가 직접 지급하는 보조금)으로 보전받습니다. 가족농들은 자식에게 당당히 농업을 물려주고, 농부들은 이웃과 함께 협동하고 연대합니다. 연대하는 쪽이 더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 농민의 농업소득에서 직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합니다. 우리나라 농업 GDP 대비 직불금 비중은 4.18%로 우리와 비슷한 규모인 이탈리아 대비 3분의 1, 프랑스의 6분의 1, EU 전체의 5분의 1 수준입니다. 농업예산 중 직불금 비중도 20%로 EU(71.4%), 스위스(75.1%)보다 매우 낮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직불금은 대부분 생산연계 직불금으로, 순수 공익적 기능에 대한 직불금은 3.5%에 불과합니다. 세계의 흐름이 농업의 환경보존, 먹거리 안전 등 환경친화적인 기능을 중시하는 직불금 정책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EU, 일본 등 여러 나라가 이미 농업농촌의 공익 기능 증대를 중요한 정책 방향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경우 연방헌법 제104조에 규정한 농업의 역할과 보상원칙을 바탕으로 공익기능에 대한 재정 지원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심층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약 60%가 농어업의 공익적 기능 헌법 명시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헌법 개정 논의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의 밥 한 공기 300원 요구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농민 두 사람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군요. 고(故) 백남기 농민과 고(故) 전용철 농민 이야기입니다. 백남기 농민은 2015년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다가 종로1가에서 경찰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었고, 서울대병원에서 317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2016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성 사람 백남기 농민은 왜 서울에 왔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가 서울에 온 것은 쌀값 때문입니다. 2015년 11월 당시 쌀값이 15~17만 원, 어떤 지역은 14만 원까지 주저앉았습니다. 백남기 농민은 심각성을 지나칠 수 없어서 서울로 와서 집회 참석을 했습니다. 쌀값 투쟁은 여전히 미완의 싸움으로 남았습니다.
백남기 농민이 당시 주장했던 쌀값 21만 원 보장이라는 것은 지금의 농촌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공깃밥 300원도 채 안 되는 걸 보장해 달라고 하는 건데 그것이 정말 무리한 요구였나요? 지금 우리 농업 인구는 257만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65세 이상 되는 고령인구가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말 농촌에서 농부가 다 사라지는 날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런 우려가 많이 듭니다.
고(故) 전용철 농민은 제가 사는 충남 보령 출생으로 보령농민회 주교면지회장을 맡아 농민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2005년 11월 15일, ‘쌀 협상 국회 비준 저지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해 경찰의 폭력에 의해 쓰러진 후 급히 뇌수술을 받았으나, 11월 23일 소생 불가 판정 후 보령아산병원으로 이송 도중 다음날인 24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쌀값은 농민 값”이라고 외쳤습니다. 제가 현재 보령시 마을만들기지원센터 이사장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이 있는 농민회관 마당에 고(故) 전용철 농민 추모비가 우뚝 서 있습니다. 추모비에 적힌 글 하나하나가 먹먹합니다.
쌀은 지금까지 우리 주식(主食)이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쌀이 주식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국민의 식생활 습관이 변하고 1인당 쌀 소비가 감소하여 전체 식생활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고 있지만 말이지요. 앞으로도 쌀을 대체하는 새로운 식량이 나오지 않는 한 쌀이 주식이라는 사실은 여전할 것입니다. 국민의 생존을 지탱하기 위해 농민은 정성껏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농민의 희생을 담보하면서도 농민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지 않습니까? 농민의 생존권을 밥 한 공기 300원과 바꾸자고 합니다. 정말 어려운 일인가요?
3. 짧은 에필로그
201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9년은 돼지해입니다. 돼지는 식성이 참 좋습니다. 2019년은 먹지 못하는 사람 없이 온 국민이 잘 먹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농민들도 잘살 수 있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부·여당이 주도한 2018년산부터 적용되는 쌀 목표가격 19만6000원에 대해 다시 한번 농민의 주장을 경청하기 바랍니다. 농민이 쌀값 때문에 울분을 토하는 한, 농촌과 농업 문제는 요원합니다. 농촌 발전은 단지 인구 유입이나 건물을 세우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될 때, 농촌이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우리나라 사회 시스템이 질적으로 점차 올라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농민들도 농사짓는 소명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며 음악도 듣고 그림도 감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등골이 휘어지게 농사에 매달리지 않도록 국민의 마음 나눔이 절실합니다. 고령화된 농민을 위해서 농업 제품들은 설명서 글자도 좀 크게 하고, 농산물 택배 발송도 어렵지 않게 도우미가 있으면 좋겠고, 마을회관 내에 공동식당도 손길이 잘 갈 수 있도록 해서 농촌 마을 공동체 구심이 되도록 지원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5년 후 쌀 목표가격을 다시 정하게 될 때는 밥 한 공기 값과 껌 한 통 값이 비교되지 않도록(물론 비싼 껌도 있지만), 정책의 진보가 있기 바랍니다. 세상은 언제나 똑같지 않습니다. 이상기후는 식량 대란까지는 아니더라도 쌀값을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느 때라도 농촌에 농민이 살고 있어야 합니다. 농민 생존권은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