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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리 마을 ‘우리동네예술단’농촌이야기 2016. 10. 11. 23:29
충남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 마을. 듣기에 전혀 생소한 이 마을에는 70대 주민들로 이루어진 극단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우리동네예술단’. 처음에는 그저 농촌에서 나이 든 분들이 연극을 한다기에 재미있어서 응원했는데, 공연을 한 번 보고 난 뒤로는 적극적인 팬이 되었습니다. 제석리 마을은 그동안 ‘서각’으로 잘 알려진 마을입니다. '서각'은 주로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예술 행위를 말합니다. 특히 마을 내에 서각체험교실이 있어서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와서 배우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참 대단한 마을이라고 여겨집니다.
작년에 서각축제를 하더니, 올가을에는 축제를 서각예술제로 키워서 서각 작품 발표회와 함께 연극을 공연했습니다. 이번에는 연극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학예회 수준의 공연이 아니라, 보령 내의 연극 단체와 힘을 합쳐 이틀 동안 무려 6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농촌 한 귀퉁이에서 말이지요. 보령 연극동아리, 청양 연극동아리, 보령청소년극단 등 여러 단체가 할아버지 할머니 극단과 함께 멋진 감동을 관객에게 선사했습니다. 우리동네예술단이 공연한 극의 제목은 ‘경순왕의 깃발’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이 마을에서 어렵게 살던 어부가 바다에 갔다가 물결에 떠내려온 함을 주웠는데, 그 안에 신라의 제56대이자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을 기리는 깃발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깃발을 고이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꿈에 경순왕이 나타나서 복을 내렸습니다. 그날 이후로 어부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궁금한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부는 사실대로 말을 했고, 마을 사람들은 경순왕의 사당을 지어 함께 모시자고 말했습니다. 어부는 욕심부리지 않고 함께 복을 누리는 것에 순순히 동의했고, 마을 사람들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십시일반 힘을 모아 경순왕 경모전을 지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을 전체가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내용인데,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각색하고 그것을 연극으로 만들었습니다. 무려(?) 일 년을 연습했는데, 연출자가 제일 고생한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사를 외우도록 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공연 날은 온갖 정성을 들여 무대를 꾸미고, 화려한 의상도 준비해서 감동적인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멋진 경순왕의 모습도 재현했고, 선녀(?)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도저히 할머니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조명도 농촌 자연을 토대로 빛을 적절하게 구사해서 어느 곳에 내놔도 자랑 할 만했습니다. 무대에서 긴급 상황 시에는 즉흥 대사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주고받았고, 몸짓 하나도 약속한 대로 구현했습니다. 발음도 정확해서 듣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이 많은 극단은 처음 봤지만, 또 이렇게 연극을 통해 즐거움을 누리기도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젊은 한 시절이 연극을 통해 흘러갔던 때가 있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왜 신라와 동떨어진 백제의 땅 보령에서 경순왕에 대한 연극을 했을까요? 동해의 경주와 서해의 보령은 동서로 끝과 끝입니다. 그런데 보령에는 신라와 연결된 곳들이 제법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성주사지입니다. 이곳은 신라 말 구산선문 중 하나였으며, 한때는 2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던 전국 최고의 절로 손꼽히던 성주사 자리입니다. 보령에 경순왕 유적지로 대표적인 곳은 왕대사라는 절입니다. 경순왕이 보령에 와 머물렀다고 해서 생긴 절이랍니다. 그리고 대천해수욕장과 연결된 남포방조제 쪽의 죽도라는 섬에서 마주 보이는 ‘보리섬’이라는 아주 조그마한 육지 섬이 있는데, 여기에도 경순왕과 신라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최치원의 유적이 있습니다.
이외 경순왕이 쌓도록 했다는 성도 있으며, 보령의 대표적인 산인 옥마산의 이름도 경순왕의 전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느 날 경순왕이 ‘앞으로 신라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가’ 답답한 마음을 안고 보령의 성주사로 가느라고 성주산을 넘는데, 갑자기 옥마(玉馬)가 나타나 경순왕과 그 일행 앞에서 하늘로 날아올라 성주산 옆 산봉우리로 날아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봉우리를 ‘옥마봉’으로 이름 붙였다는데, 현재도 ‘옥마봉’으로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도 ‘옥마산’으로 표기가 돼 있습니다. 경순왕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지니 여기서 멈추겠습니다만 아무튼, 보령에는 경순왕에 대한 이런저런 전설이 많습니다.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런 전설을 각색하고 연극으로 만든 제석리 사람들은 참 대단합니다. 아마 이런 연극은 농촌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연극은 인간의 삶의 근원적 경험에 깊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연극의 시작은 인간이 자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가지 모방의식을 만들어내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제의(祭儀) ·굿 ·놀이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났다고 하지요.
제석리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연극을 통해 함께 나누는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혼자 누리는 복보다 함께 누리는 복이 더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건강한 공동체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지요. 오늘 우리는 함께 사는 삶에 참 인색합니다. 도무지 나눌 줄을 모릅니다. 경북 봉화에서 농사지으며 자연에 순응한 삶을 살면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고 말했던 전우익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옛날 더 어려웠던 시절에도 복을 혼자만 가지려고 하지 않고 함께 나누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 마음을 이어받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마을은 그 자체로 복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을연극은 공동체연극입니다. 공동체연극은 구성원들이 문화예술 행위로 자신의 일상을 표현하고 삶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연극을 통해 공동체의 문제를 다른 구성원과 공유할 수 있게 해서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농촌에서 공동체연극은 문화로부터 소외되었던 농민들이 연극에 참여하여 문화의 주체가 됨으로써 그들의 견해가 폭넓게 공유되는 현장이 됩니다.
마을연극은 전통적인 연극과는 다른, 새로운 참여 방식들을 발전시킵니다. 우선 공연자와 관객이 통합되어 집단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잔치의 소통 방식을 보여줍니다. 제석리 마을 연극에서도 관객과 배우가 아주 잘 아는 사이여서 연극을 보면서 던지는 관객들의 추임새도 마치 훈련받은 모습처럼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습니다.
연극을 보면서. 농촌에서 연극이 지역사회의 소통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런 연극을 통해 마을이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공적 담론의 터전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예술 행위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연극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연극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운 일이여유. 저 사람이 저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유. 대단허유.” 마을 사람들 말 속에 연극을 하는 충분한 이유가 들어 있었습니다. 즐거운 체험이 집단적 문화예술 행위가 되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원래 농촌은 공동체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서로의 행위를 이해하고,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통해 문화를 창출하고 재생산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문화의 힘이 지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하고, 마을을 지탱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지금은 그런 모습들이 산업화에 밀리고 자본에 끌려가면서 찢기고 너덜거려졌습니다. 마을은 해체되고 있고, 고령화는 마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래서 제석리 마을 연극을 보면서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나이에 굴하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며 연극을 한다는 것은 우리 농촌이 가야 할 새로운 이정표 하나를 세운 것 같았습니다. 마을연극은 일상 안에서 참여자들의 공동체 소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공연을 할 때마다 공동의 애착심이나 심리적 유대감을 형성할 것입니다.
연극을 통한 상상력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대안적 현실로 만들어 줍니다. 도피적 상상은 현실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공동체를 염두에 둔 상상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희망을 제시합니다. 상상력은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힘이고, 인간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과 상통합니다. 그래서 연극을 비롯한 예술은 아주 오래전부터 공동체의 집단의식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다른 세상을 이해하게 해 주는 도구였습니다. 제석리 마을은 상상력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2009년 제14회 대한민국 신지식인에 선정된 정지완 제석리 서각예술제추진위원장은 “지역의 작은 축제지만 문화예술을 매개로 마을의 정체성을 살리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서각예술과 연극을 통해 제석리 마을이 나가야 할 큰 그림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상의 힘은 참 큽니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농촌 지역 문화가 활기차지 못합니다. 경제 성장에 휘둘린 지역 정체성이 흔들리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지역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지역의 삶에 대한 의문과 문제의식은 삶의 실체를 더욱더 냉정하게 들여다보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관심은 올바르게 변화시키려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공동체연극은 그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도구입니다. 제석리 극단의 공연이 있기 전에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다들 나이 많으신 어른들인데 생기가 돌았습니다. 식사하면서 연극 이야기부터 축제의 활성화, 그리고 마을의 발전 등 많은 이야기가 진지하게 나왔습니다. 저도 몇 마디 거들었지만 듣는 시간이 제게는 공부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연극 연습을 하면서 표현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연극 연습을 하느라고 자주 모이면서 마을에 대한 논의도 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관심이 쏠린 시간이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켰겠지요.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런 공동체 몸짓이 농촌 곳곳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나이에 상관없이 상상력을 키우려는 모습은 희망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리고 소통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할 것이고요. 농촌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불통 요소도 많습니다.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모였는데 마을 회의에서는 긍정보다 습관적으로 부정이 많은 경우도 봅니다. 부정의 논리가 명확한 것도 아니고요. 잘 아는 것 같은데도 어긋나는 것은 오랫동안 같이 살아서일까요? 그러지는 않겠지요. 어떻게 보면 소통하는 연습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막걸리의 유익함 못지않게 공동체연극 같은 집단적 문화예술 행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실 예술 행위로 이어지는 공동체 의식은 똑같은 것을 반복해도 새롭게 받아들입니다. 어쨌든 약속한 것을 만들어야 하니, 어려워도 계속 발전적인 의견이 나옵니다. 불통이 열리면 희망이 있습니다.
가을이 지나면 제석리 마을 ‘우리동네예술단’은 차기 공연 연습에 들어갈 것입니다. 내년이면 마을 사람들은 나이도 한 살씩 더 들겠지요. 늙는다기보다 연륜이 더 쌓인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내년 공연은 어떤 모습일까요? 올해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 경순왕의 깃발은 더 각색되고 세련돼져서 무대에 올려질 것 같습니다. 소문 듣고 온 관객은 더 많아지겠지요. 아무래도 관객 많은 공연은 흥도 저절로 날 테고요. 멋진 서각 작품들은 보는 이들에게 예술의 영감을 한껏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저도 상상을 해본다면, 마을 전체가 한 편의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아니지만, 여러분을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대천해수욕장 가기 전 마을이니, 마을을 둘러보고 바다로 가서 큰마음을 얻고 가던지, 바다를 둘러보고 마을에 와서 넓어진 마음을 즐거움으로 채워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