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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은 말 그대로 ‘졸업의 달’이어서 농촌의 학교들도 정해진 일정에 따라서 졸업식을 치렀다. 농촌에서 이십 년을 넘게 산 덕분인지 몇 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해야 했다. 졸업하는 아이들의 앞날에 복을 빌어주고, 그동안 많은 수고를 한 선생님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드렸다. 언제나 봐도 졸업식은 진지하다. 장난꾸러기들도 졸업장을 손에 쥐면 그동안 다녔던 학교를 떠나야 하는 사실 앞에 숙연해진다. 여전히 농촌학교의 졸업식 노래는 목이 멘다. 슬픈 졸업식을 원하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졸업식 노래는 모든 이들 마음에서 차분히 맴돌기를 바란다.
올해는 지역 내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유난히도 졸업하는 아이들을 소개하는 각자 게시판이 눈길을 끌었다. 초등학교는 졸업식장 입구에 아이들 사진과 좌우명, 그리고 장래의 희망을 큼직하게 써 놨고, 중학교는 졸업식장 정면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영상으로 아이들 소개를 해 놨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좌우명과 장래 희망을 읽어가니 웃음도 나오고, 오래전 이맘때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올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는 영민 이의 좌우명은 ‘빨리 포기한다.’였다. 왠지 긍정됐다. 그래, 질질 끌지 말고 시원하게 결단하렴.
중학교 졸업식에서는 당연히(?) 초등학교보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다양했다. 바이올리니스트도 있고, 미용사, 제빵사, 산업디자이너, 수학교사, 기자, 법조인, 쇼콜라티에(chocolatier), 배우, 회사원 등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꿈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그리는 희망이 장래에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라고 간절히 기원했다.
그런데 세상은 아이들의 장래 희망을 지켜줄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아이들이 부딪혀야 할 냉정한 현실은 금방 다가올 것이다. 얼마 전에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층 실업률은 9.2%로 1년 전보다 0.2%포인트 상승했다. 1999년 통계 기준이 바뀐 이후 가장 높은 것으로 전년도 전체 실업률(3.6%)의 2.5배 수준이다. 15년 만에 가장 높은 기록으로 나타나자 청년 실업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문제는 우리 청년들이 실업률 통계수치 그 자체보다 훨씬 심각한 청년 고용 현실에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몇 년째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청년 고용률과 청년 취업자 수의 문제 해결은 앞으로도 쉽지 않은 어려움이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넘어서 5포 세대, 꿈조차 포기한다는 7포 세대, 그리고 이보다 더욱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N포 세대라는 말의 등장은 그야말로 말을 잃게 한다. 청년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런 단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저렇게 발랄한 아이들에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말할 필요는 없지만, 장래 희망을 빨리도 사라지게 하는 세상은 너무나 불행하다.
진일보한다는 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1월에 열린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는 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미래의 기술 확산 전망이 발표됐다. 4차 산업혁명이란 현재의 산업적·기술적 국면의 속도와 범위 그리고 시스템에 가해지는 충격이 그 이전 세 번의 산업혁명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의 가장 크고 가시적인 영향은 일자리의 급격한 축소라고 한다. 다보스 포럼은 앞으로 5년 이내에 주요 15개 나라에서 일자리 700만 개가 사라지고 새로운 일자리가 200만 개 만들어진다고 예측했다. 다시 말하면 일자리 500만 개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전의 산업혁명이 기술 발전에 따른 새로운 유형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혁명이었다면, 4차 산업혁명에서는 기존 일자리가 사람이 아닌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고 한다. 그런 일정도 이미 예측하는 것 같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는 미지수지만.
이번 다보스 포럼의 발표는, 점점 더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인한 파괴적 변화를 더는 간과할 수 없다고 공인한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다보스 포럼 이후 인류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논조가 많아졌고,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과장된 측면도 있겠지만, 현재의 기술적 변화에 발맞춘 사회구조의 대전환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양극화와 파국이 예정된다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충분하다. 미래 기술의 확산이 세계 경제의 저성장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기업들의 기대도 있지만, 인공지능과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면서 직종 간의 격차가 커지고 예전과는 또 다른 노동시장의 붕괴 등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 격차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청년들이 체감하는 절망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흐름 앞에서 한 사람의 생각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사람의 생각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데 농촌에서는 도무지 무력하기만 하다. 그래도 씩씩하게 자신의 미래를 그리는 아이들을 보니 희망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도시보다 더더욱 일자리도 소득도 없는 농촌에서 사회의 불평등과 빈부 격차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사실 희망을 만들고, 이런저런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아이들을 위해서만도 아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라도 필요한 일이다. 막연하게 보이고 능력도 없고 힘도 부족한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이 넓은 우주에서 점 하나보다 작은 지구 위에 살아가는 그야말로 작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 일이 어떤 것인지는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것이 되든지 그 시작은 연대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농촌에서 사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커진다. 작을수록 연대하는 일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문제 해결도 함께 살아가는 연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연대할수록 인공지능도 로봇도 사람 위에서 내려와 함께 사는 세상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연대하는 가운데 아이들의 장래 희망도 구체적인 모습을 띠면서 가야 할 길을 함께 만들어 가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꿈같은 소리일까? 빌 게이츠는 다보스포럼에서 기술의 진보에 방점을 두면서, 기술의 진보가 인간사회에 해악보다는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기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2%도 안 되는 미국 농민이 미국 전체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선택권이 늘어나면서 기본적으로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고 미래를 낙관한다고 말했다. 그래,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좋은 세상에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고 탐욕이 아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기술의 진보를 위해 그 시작에 우리 모두의 연대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요즘 사회적기업에 관해 관심을 가지면서 흩어져 있는 중소농가 경영체를 묶는 일을 시작했다. 몇 사람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수목원과 카페형 판매장을 농가 연대의 센터로 삼고 유기농 우유 목장, 그리고 우유에 관심을 두고 커피 생콩을 직접 로스팅하는 청년 커피 팀, 할머니가 문을 여는 유기농식품점, 힐링 민박, 가까운 농촌체험마을, 바닷가 모텔, 마을 식당, 여기에 지역 내에 있는 중학교까지 묶으려고 한다. 중학교는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몇 아이들에게는 연대 속에서 실제로 만들어지는 일자리의 주인공으로 이끌고 싶기 때문이다. 하여튼 시동을 건 연대 사업팀의 이름은 ‘신죽리수목원네트워크’이다. 지난 1월부터 2월 초까지 사회적기업 교육을 받으면서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에 도전하고, 또 연대하는 팀과 꾸준히 회의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모으고 있다.
발단은 어느 날 대여섯 사람이 모이면서 시작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앞으로 살아갈 것에 대한 걱정스러운 이야기도 나오고, 그러다가 함께 힘을 모아 어떤 일이든지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모두 그렇게 해보자고 했다. 다들 오랫동안 농촌에서 살아온 터라 그동안 보고 느꼈던 농촌에 대한 생각을 모았다. 그리고 다듬기 시작한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흩어져 있는 농촌의 자원을 네트워킹하는 일이었다. 농촌이지만 그래도 한 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지역 내에서 소통의 끈이 제법 굵어졌다. 몇 년 전부터 마음으로도 가까워진 젊은 커피 팀이 있다. 보령에서 직접 커피 생콩을 로스팅하고, ‘보령커피’라는 브랜드를 키워가고 있어서 당연히 함께하기로 했고, 유기농 우유의 생산과 체험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다는 젖소목장도 ‘보령우유’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고, 예술적인 옹기를 구워내는 옹기장이도 참여하고, 바닷가 기슭에서 산채 나물을 키우는 부부도 멋진 민박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참여하고, 이 지역에서 친환경 농업의 선구자였던 남편을 먼저 보냈지만, 그 뒤를 이어서 유기농업을 지속하고 있는 할머니도 참여하기로 했다.
농촌자원을 네트워킹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다. 보령커피와 보령우유, 신죽리수목원 체험센터를 묶어서 보령 커피 벨트를 만들어 가는 일. 그리고 미시적 마을 관광을 진행하는 일, 수목원 숲을 학교진로체험지원장으로 제공하는 일, 도시민과 농산물 직거래, 농촌축제 기획, 야생화 재배, 농촌학교 예능교육 지원 등이다. 열거하니 많은 일 같지만, 각자가 나름대로 그동안 해 온 일을 보완하거나 시너지 효과를 위해 엮어주는 것이어서 어렵지는 않다. 미시적 마을 관광이란 농촌 자체가 볼거리라는 바탕 위에서 모든 농촌 자원을 여행지로 제공하는 일이다. 학생 수가 작은 낙동초등학교는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모습만으로도 도시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단풍나무 숲 속 커피 한 잔은 외국에 온 느낌을 준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친환경 시골 밥상은 그 자체를 여행을 통해서만 먹을 수 있는 보약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다. 시간별 바닷가 풍경은 무척이나 근사하다. 미시적 마을 관광은 앞으로 독립적인 관광협동조합 결성을 통해 더욱 구체화할 생각이다.
보령커피 팀과 유기농 우유 목장은 당장 꾸준한 일손이 필요하다. 그러나 농촌에서 꾸준히 일하려는 이들을 대하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든든한 일자리라는 믿음이 생기면 농촌도 즐거운 삶의 자리가 될 것이다. 보령 커피 벨트도 일자리를 더욱 알차게 만들어가야겠지만, 그 일자리의 주인공을 만들어 내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중학교 교장 선생님과 논의하면서 중학교 내에 방과후학교 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적성에 맞는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학기 중은 물론이고 방학 때는 집중적으로 커피 로스팅과 우유를 다루고 치즈 만드는 일을 배우는 등, 앞으로 5~6년 후에는 나고 자란 농촌에서 멋진 희망을 펼치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농촌은 어렵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협력하여 건강한 공동체 기반을 만드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경제적으로도 네트워킹을 통해 고용 창출과 생산품 판매 및 소득의 동반상승을 이루는 길은 더디더라도 가야 한다.
정부나 각 지자체도 이런 일을 계획하거나 실행에 옮기고 있지만, 거시적인 측면이 크다.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고 결국은 기업형 경영체 외에는 일의 진척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실 근본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고 생산인력이 부족한 농촌에서는 사업이 어렵다. 농촌에서 지속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방법을 찾는다면 ‘연대의 공동체적 관점’을 형성하는 일이다. 그 관점이란, 일차적으로 농촌 삶의 질 향상과 건강한 지역사회 증진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부나 지자체는 연대를 통한 시너지 효과 창출에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선 성과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과 우선주의에서는 창의적 동력을 만들 시스템을 구성할 수 없다. 그 결과 협동에 의한 농촌공동체의 발전은 요원한 일이 되었고, 결국은 대다수의 사업이 능력 있는 경영체나 개별 단위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다. 다들 잘 알지 않는가.
농촌에서 장래 희망을 꿈꾸는 길 중 하나가 농촌 자원을 토대로 한 네트워크 기반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원은 자연환경을 비롯한 농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모습이며, 그 자원을 활용할 수 있거나 혜택을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농촌의 구체적인 기반이 원래 미시적 연결고리의 선상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제 한편에서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농촌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연대를 통한 발전의 도모는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다. 다만, 이런 일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전략과 실천이 필요하고 기업가 정신도 필요하므로 연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회적기업, 또는 그에 준하는 길을 가려고 한다.
연대한다는 것은 같아지라는 것이 아니다. 다르므로 그 다른 것으로 서로 부족함을 채우고 함께 가자는 것이다. 다르다는 이유로 각자의 길을 가버린다면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졸업식장 아이들의 장래 희망을 보면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희망이 모여서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다르므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기술의 진보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영향이란 편중되지 않고 골고루 미치는 즐거움이다. 이는 함께 할 때 가능하다. 좋은 세상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응원을 받는 세상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지만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고, 작은 새싹 하나가 화창한 봄날의 문을 연다. 내버려 둔 세상은 아이들의 장래 희망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통계청의 고용동향 보고는 우울하지만, 이 우울함을 마냥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면 우리는 지금 서로의 연결고리를 확인해야 한다. 연결고리가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도 튼튼하게 이어져 있기를 바라는 일이 우리의 장래 희망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