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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농업에 대한 단상(斷想)농촌이야기 2015. 8. 12. 23:29
올여름은 비가 그렇게 내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장마가 끝나니 불볕더위가 찾아왔습니다. 유난한 것 같은 폭염은 힘들어도
가을을 빛낼 많은 생명이 더위 속에서 점점 제 모습을 갖춰갑니다.
강아지풀도 기세를 멈추지 않습니다. 서재 옆의 강아지풀은 친근함이 더합니다.
강아지풀을 볼 때마다 언제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요.
손바닥에 올려놓고 강아지 부르듯이 당기면 살살 간질이던 느낌은 지금도 즐거움입니다.
강아지풀은 잡초라고 천대를 받지만, 옛날에는 구황식물로 사용되기도 했고,
우리가 잡곡으로 먹는 조(粟)의 원조이기도 합니다.
흔한 것 같아도 오염에 약해서 이제 도심지에서는 갈수록 보기 어려운 녀석이지요.
더위 속에서 휴식을 찾을 때면 가끔 농민들과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 친환경 미생물 농업에 관심이 많아서 직접 농사는 짓지 않아도, 주변에 조그만 시설(?)을 갖춰서 미생물 활성액을 보급도 하고 때로는 활용 교육도 합니다. 이런 일은 제가 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합니다.
주로 미생물을 어떻게 농사에 활용해야 하는지를 이야기 하지만, 이야기 속에 농촌과 농업의 미래에 대해 무거운 마음을 주고받을 때도 있습니다. 애타는 농민의 마음을 대할 때면 힘없는 저라도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다가 제풀에 꺾이지만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마다 터전으로 돌아가면
저는 습관적으로 들꽃마당 작은 꽃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농업국가가 아니지요.
산업화 사회의 모습을 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이 말 속에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산업화사회 속에서 특히 금융 상품이 시장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농업은 아예 젖혀둘 정도로 힘을 잃고 있지만, 땀 흘리지 않고 돈으로 돈 버는 방법들이 경제 뉴스의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말처럼 이만한 국토와 몇천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가진 사회가 농업을 내버리고도 과연 미래가 있는 국가로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배짱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FTA 시대에서 몰락하는 농업의 보상을 다른 경제적 구조에서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농업이 완전히 몰락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경제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언제 한 번 경제가 제대로 그럴듯하게 우리 곁에 선 적이 있던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늘 경제가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경제 성장을 통한 장밋빛 환상은 우리에게 계속 경제 성장에 몰두하게 합니다.
돌아보면 정말 우리의 경제는 그동안 지속적인 산업 구조화로 말미암아 많은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갈수록 생활비가 많이 들어가고 소비해야 할 것들은 늘어납니다. 세금도 계속 늘어납니다. 그리고 연일 뉴스에 나오는 많은 사건을 봐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만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사회의 발전을 오직 경제 성장으로만 생각하는 일들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둔한 질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제가 발전하면 우리는 과연 행복해질까요?
일상의 문제들은 하나하나 편안하게 해결되고 있나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참으로 무딘 신경이지만 아무리 봐도 온갖 모순과 갈등은 돌출되고, 환경오염, 먹을거리 문제, 비정규직 문제, 아이들의 교육 문제, 무엇보다도 양극화의 문제는 계속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몸집이 비대해지는 공룡처럼 말이지요.
공룡이라고 하니 최근 우리 지역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이 떠오릅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보고된 공룡발자국 화석 가운데 충남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라는 군요. 공룡 발자국을 보면서 공룡의 멸종에 대해 생각합니다. 공룡 멸종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무튼 몸집이 비대해진 공룡들은 여러 위기 앞에서 제 몸 가누기도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비대해진 몸집은 자초한 것일 수 있고요. 우리 사회와 그렇게 비극(?)의 줄이 연결되는 것 같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요?
농촌학교에서 스쿨버스 기사와 운영위원장을 오랫동안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교육의 위기도 저절로 생긴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교육도 성장 일변도의 도구가 되면서 농촌학교의 공동체 교육은 설 자리도 없고, 갈수록 비교와 경쟁에서 상대되지 않는 농촌학교의 존폐문제는 단지 농촌에 아이들이 없다는 것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인적인 교육으로 말한다면 농촌 환경만 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의 시대에서 농촌 환경 정도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다.
행복하자면서 온 힘을 기울이는 경제 성장이 오히려 삶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현실은
우리 스스로가 행복의 길을 막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러 나라들과 FTA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농업은 포기하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당연시 된다지만, 그러나 농업은 단순한 경제적 문제만이 아닙니다.
개인과 한 사회의 행복한 존속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자연과 지구의 문제입니다.
이반 일리치의 말을 빌리면,
좋은 삶이란 거창한 구조물을 건축하거나 뛰어난 문화재를 남기거나 하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이웃과 함께 일하고, 서로 돕고 보살피는 가운데서 생을 즐기는 데 있습니다.
농업이 바탕에 깔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방향이 많이 틀어져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농업 자체의 방향도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최근에는 정부를 중심으로 농업을 6차 산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3차 산업에서 4, 5차 산업을 건너뛰어 6차 산업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6차 산업의 명명은 간단했습니다. 6차 산업화란 1차 생산에 2차 가공을 더 하고 3차 판매나 서비스를 합하면 6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차 산업인 농업에서 농민은 농산물의 생산, 가공, 유통까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농업 현실에서 이 세 가지 일을 해낼 수 있는 농민이라면 기업농이나 집단화된 경우가 아니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농업의 즐거움은 돈 버는 즐거움에 지나지 않겠지요.
농업의 즐거움이란 마치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듯이,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에 대해 칭찬과 감사의 말이 오갈 때 시작합니다. 그래서 농사에 정성이 쌓여가는 것이고요. 모든 농산물 생산이 다 이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 마음으로 주고받는 농산물 직거래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농사짓고 살아가는 것이 중노동이고 고통뿐이었다면 벌써 농경은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일이 힘들고 맨날 손해만 보는 것 같은데도 농사를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이들의 삶이 흙과 더불어 자연과 상생하고, 스스로 누리는 근원적인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즐거움이 농촌과 농업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고, 농촌의 생태계는 기업농의 기계화 속에서 굳어지고 있습니다. 소농들, 고령화된 농민들의 얼굴엔 주름만 더 깊이 팹니다.
인간 공동체의 파괴와 생태적 파국 앞에서 우리 사회는 오히려 경제 성장의 논리에 더 편승하고, 삶의 진보를 위해 봉헌해야 할 학문은 사람이 자연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침묵이 어디 학문뿐이겠습니까? 종교도 그렇지요. 오히려 한술 더 뜨는 모습에 마음이 아픕니다.
각설하고 짧은 생각을 정리한다면
농촌의 회생과 건강한 농업은 삶의 희망을 보게 해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엔 단순하게 농사짓는 기술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끝까지 간직해야 할 모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삶을 위한 방향 전환이 무엇보다도 절실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움직임입니다.
지금은 계몽주의 시대가 아니지만, 희망의 걸음을 딛는 이들을 보고 싶습니다.
풀로 잔뜩 덮인 곳에서 설렁설렁 걸어도 괜찮지요.
루쉰의 말처럼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니까요.
그래요. 행복하게 살고 싶은 길을 찾고 싶으니까요.
다시 강아지풀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살 당깁니다.
간질거리는 즐거움이 온몸을 덮습니다.
물결치듯이 멀리멀리 퍼져나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