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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3 17:57

우리는 서로를 볼 수 있을까?


영화 ‘명량’을 봤다. 아니, 이순신을 봤다. 영화를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성화도 있고 해서 모처럼 읍내 극장엘 갔다. 영화에 대한 여러 평이 있지만, 그래도 제법 몰입을 높여주는 영화였다.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이긴 이순신. 끝내 전쟁의 흐름을 바꿔버린 이순신.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우리 민족에게 이순신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일단 이 감동만으로도 영화를 본 보람은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무언가 아련함이 내내 밀려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 때문이었다. 이 아련함은 선조 임금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여 병이 든 채 백의종군하면서 다시 전쟁터의 늙은 장수가 되는 이순신을 열연한 그 모습일 수도 있지만, 꼭 그 때문은 아니다. 명량을 보면서 예상하지 않게 최민식의 다른 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민식이란 배우가 열연한 영화가 여러 편 있지만, 나에게는 최민식 영화 하면 ‘파이란(2001. 송해성 감독)’이 우선 떠오른다. 아니, 그동안 영화 보기에 게을렀던 내게는 그저 파이란이 최민식 영화의 전부일 수 있다. 명량의 최민식이 처음 반갑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던 이유는 파이란의 최민식과 은연중 겹쳐서였을까? 


파이란은 2001년에 나왔고 이제 13년이 지났으니 옛 영화에 속할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파이란에 관한 스포일러(spoiler)가 될 수 있겠지만, 이 글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간단하게라도 줄거리를 말해야겠다. 사실, 파이란 같은 영화는 줄거리에 의존하기보다는 전개를 따라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파이란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 ‘러브레터’를 감독이 직접 각색한 영화이다.



배 한 척 살 돈 마련해서 돌아오겠노라 말하고 고향을 떠나온 이강재(최민식)는 인천에서 조폭 생활을 하지만 천성이 삼류 양아치다. 조폭으로 카리스마는커녕 스스로 삼류 인생으로 치부할 만큼 어수룩하고 소박(?)하다. 함께 조직을 시작한 동기는 보스가 되어있지만, 그는 주먹만큼이나 마음도 약해 후배 양아치들에게도 선배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나마 맡아 일하던 비디오 가게까지 후배에게 빼앗기고 구석진 오락실에서 하루해를 보내는 그는 어느 날, 뜻밖의 사건에 휘말려 조직의 보스와 인생을 건 계약을 하게 된다.

동기이자 조직의 보스인 용식의 살인을 곁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용식은 그에게 대신 살인의 범인이 돼 달라고 부탁하며 대가로 강재의 평생의 꿈인 배 한 척 값을 제시한다. 용식이 대신 감방에 가기로 어렵게 결심하는 그에게 영문모를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뜻밖에도 아내 파이란(장백지)이 사망했다는 부음 소식이었다. 결혼? 아내? 파이란? 강재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돈 몇 푼에 위장결혼을 해 준 기억을 그제야 강재는 떠올린다.


파이란은 여주인공 이름인 백란(白蘭)의 중국식 발음이다. 이 중국 여인은 부모가 죽자 친척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무작정 한국으로 왔으나, 이미 외국으로 떠난 친척을 만나지 못한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직업소개소의 주선으로 위장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한다. 강재는 그녀의 뒷모습만 흘끗 보고 몇 푼의 돈을 받기 위해 호적상의 남편이 됐었다. 그는 위장 결혼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러 강원도로 떠난다. 그녀는 몇 번의 과정을 거쳐 바닷가 오지의 한 세탁소로 팔려갔었다. 


이제 영화는 강재가 단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파이란’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시간의 과정에 중심이 모인다. 강원도를 향하는 기차 안에서 처음으로 파이란의 사진과 편지를 본 강재는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인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의 여인이, 다른 나라의 후미진 땅에서 고된 노동과 극심한 외로움, 그리고 육체를 짓누르는 질병의 두려움 속에서 쓴 편지이다. “… 이곳 사람들 모두 친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 강재 씨 …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어느덧 파이란은 낯선 땅에서의 편견과 멸시, 가혹한 학대와 착취의 일상에서,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다고 말하면서 그 친절한 대상을 강재를 통해서 구체화한다. 잊지 않기 위해 늘 머리맡 사진으로 바라다본 강재는 파이란에게 이 땅의 사람 사이에서 자신이 사랑할 진짜 남편이 돼 있었다. 강재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모든 인간의 조건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생명의 절규와 같은 것이다. 

“나는 곧 죽습니다. 죽는 거 무섭지만 드리는 거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합니다. 비 옵니다. 아주 캄캄합니다. 강재 씨가 정말 좋습니다. 내가 죽으면 만나러 와 줍니까.” 파이란의 편지에서 강재의 내면이 큰 폭으로 흔들린다. 울음이 터진다. 그가 지지리도 비참했던 생의 방향을 바꾸고자 한, 배 한 척 값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대가로 10년여의 감방생활을 선택해야 할 지금의 처지는 어떤 것일까?


해맑은 파이란의 사진과 막다른 삶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절망적으로 사랑을 구하던 그녀의 편지를 가슴에 담은 강재의 영혼은 한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배 한 척의 값, 금의환향의 욕망, 그 이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다. 절망과 분노에 빠져있던 강재는 파이란을 통해서 근본적인 인간의 조건을 마음으로 깨닫는다.

용식에게 감방 안 가고 고향에 내려가겠다면서 짐을 챙기던 중, 우연하게 파이란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보다가 용식이 보낸 사람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강재의 비극적 결말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마지막 순간에도 화면에 비친 파이란을 통해서 그 무엇으로도 누를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강재는 조폭 세계에서 사람 노릇 못한다고 무시당했다. 확실히, 사람 노릇이 물질과 권력과 욕망 앞에서 내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면 강재의 어수룩함은 사람 노릇을 못한 것일 수 있다. 조폭 세계뿐일까? 일상의 세계에서도 이런 사람 노릇 한다는 것이 조폭 세계와 얼마나 다를까? 배 한 척 값에 자신의 운명을 소모품처럼 내맡기고자 하는 이들이 주변에는 없을까? 결국, 하나는 음지에서, 하나는 양지에서 사람 노릇 한다는 꼴이 똑같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조폭 영화가 때때로 대중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것은 그 시기의 지배적인 심리 성향이나 사회의 내적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와 성공의 추구라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목표가 조폭 사회에서는 조직과 폭력에 의해서 돌아가고, 일상에서는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돌아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사람 노릇 제대로 하려면 물질과 욕망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사람 노릇 못한다고 무시당하는 강재를 통해서 영화 파이란은 역설적으로 사람 노릇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역설적인 질문은 인간 구원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장르가 애매하다. 강재에 대해 마음이 울컥해지게 하는 최민식의 연기가 좋다.


명량의 최민식에게로 돌아온다. 파이란의 최민식보다 명량의 최민식은 몸집이 상당히 통통하다. 그건 아무래도 괜찮다. 누구는 다르게 볼 수 있으니까. 영화에서 최민식이 분한 이순신은 싸움의 이유를 임금이 아닌 백성에게 돌린다. 전략적으로 따를 수 없는 임금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삼도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기고 고문까지 당하며 백의종군을 했으면서도,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걸며 승산이 없는 전쟁에 몸을 던지는 이순신은 “충(忠)은 왕이 아닌 백성을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임금에 연결된 백성이 아니라 하늘에 연결된 백성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싶다. 혼자만의 비약으로 사람을 향해 구원의 줄을 던지는 명량의 이순신과 파이란의 강재의 모습을 교차시킨다. 누군가 한 몸을 던져 백성을 이끌어 내거나, 스스로 사랑의 힘을 받아들임으로 인간의 가치를 회복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끔찍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물밑에 있던 것들이 모두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다. 세월호 참사는 여전한 슬픔으로 남아 있는데, 육군 22사단 임 병장 총기 사건이 그렇고, 28사단 윤 일병의 참혹한 죽음은 과연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군대는 조직으로 움직이는 세계이다. 개인의 가치보다 조직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그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사람 노릇 못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저마다 사람 노릇 하기 위해 움직이다 보니 조직의 논리는 더 탄탄해지고 사람은 온데간데없다. 그 빈자리는 무엇이 대신할까?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군대만은 아니다. 힘든 기억은 일상으로 나와서도 강한 자를 중심으로 전체를 휘어잡으며 걸맞은 삶을 강요한다. 정말 이 사회에 부합한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진정한 삶인가.


세월호 사건도 전체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한낱 사고에 불과하다. 그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개별적인 교통사고 정도일 수 있다. 그래서 특별법 제정이니 하는 것들은 여타의 사고들에 비해 과한 요구고, 적당한 선에서 끝내는 것이 공평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 또한 아무래도 좋다. 그런 시선, 그런 생각, 다 좋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사건은 그런 생각의 패착이 송두리째 드러난 사건이라는 것을 더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세월호의 가장 큰 슬픔은 아이들이 끝까지 기다렸다는 데 있다. 마지막 영상을 보면, 방송으로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나 하나 때문에 무엇인가 잘못될까 봐 꼼짝을 안 하고 기다린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될까 봐서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린 구조의 손길은 도통 내려오지 않는 명령 앞에서 이미 무기력하다. 비극은 304명이나 되는 생명의 무게가 우리 사회에서 너무 가볍다는 것이고, 그 값은 보상금 같은 물질로만 계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무너지는 마음 부둥켜안고 백성을 향한 충심(忠心)이나, 스스로 회복하는 인간의 가치는 밀려나 있다. 영화에서나 보고 눈물 글썽거려야 할까.


세상에서 강자와 약자가 두 종류의 사람이고, 각각 사람 노릇 하는 것이 다르다면 일상의 절망은 끝이 없을 것이다. 사실, 욕망의 비인간성과 잔혹성은 폭력이라는 수단과 돈이라는 수단을 통해 모든 현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매일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약자들에게 전쟁은 일상이며, 어수룩함은 운명도 소모품처럼 사용하게 한다. 혼돈을 깨트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명량에서 이순신은 몇 번이고 자신에게, 그리고 아들에게 되묻듯 질문을 던진다. “만약에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말이다.”라고. 그리고 이어진다. “그 용기는 백 배, 천 배, 큰 용기로 배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영화가 남긴 명대사이기 이전에 우리가 늘 곱씹어야 할 말이다. 그리도 꼼짝 못했던 보스 용식의 제안을 거부하며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한 강재의 용기가 파이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데서 나왔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도 그 길은 열려져 있다. 우리가 서로를 볼 수 있다면, 네가 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진실로 우리는 서로에게서 무엇으로도 누를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다. 슬픔과 고통이 눈물만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여는 시작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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