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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었습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저렇게 떨어진 나뭇잎은 이별을 준비하면서 얼마만큼 사연을 만들었을까요? 흙으로 돌아가는 잎들을 보면서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잊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 이들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홍성 읍내에 나갔다가 주차장 한편에서 펄럭이는 노란 리본을 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새삼 마음에 새겼습니다. 내가 사는 땅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 먼저 떠난 어느 사람의 삶도 가볍지 않고 그 속에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가끔이라도 그들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별을 기억하는 것이 서로 연결하는 시작입니다. 가시덤불 한 포기라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다른 생명의 터전이 되었고, 오늘은 그 자리에서 예쁜 꽃이 피어납니다. 가시에 찔린 아픔도 기억나지만, 그 그늘에 잠시 멈추어 섰던 것도 기억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요?
이별 1.
한 사내가 50여 풍상(風霜)을 껴안고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무척이나 연로하신 어머니와 고생에 찌든 아내, 그리고 이제 꽃보다 더 아름답게 피어난 두 딸과 아직은 좀 더 자라나야 할 아들 하나를 두고 중환자실 무표정한 가습기의 세례를 받으며 마지막 숨 한 번 내쉬고 아내의 손에 눈을 감았습니다. 돌아보면 허망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삶. 누구나 그에 관해서 기억한다면 늘 술 취한 모습과 갖가지 질환으로 시달리던 모습, 그리고 비틀거리던 오토바이와 가족들이 부딪쳐야 했던 폭력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떼고, 간이 붓고 복수가 차고 뇌가 부석거린 몸을 추슬러 영안실로 간 그는, 하룻밤을 보내고 어느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그동안 중환자실에 묶여 있던 설움을 날리기라도 하듯 푸른 하늘 아래서 나풀거리다가 그렇게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외로웠던 나는 배웅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별 2.
아이를 낳고 바로 숨을 거둔 젊은 엄마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인큐베이터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아빠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고통 앞에서 너무나 힘겨워했습니다. 아이 아빠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지켜봐 왔던 터라 그의 슬픔은 내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천국에 꼭 갔느냐고 간절히 묻던 그 질문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옆에서 할머니는 아들 걱정, 손자 걱정에 목이 메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시립묘지 매장 터에서 인부들이 흙을 떠올릴라치면 때맞춰 부는 바람에 흙이 입으로 들어오기를 여러 번. 질근질근 씹으며 아픔마저 묻히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날은 푸른 나무도 붉게 보였고, 흘러가는 구름은 눈물의 강이었습니다. 아이가 뒤뚱거리기 시작하자 기어이 정든 집을 뒤로하고 부모님 모시고 서울로 가더니 지금까지 내려오질 않습니다.
이별 3.
암으로 오랜 시간 고통받던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아이들 눈물을 추스르며 날마다 슬픔에 찌들던 사내. 어느 날은 자신보다 더 슬픈 모습을 담아보겠다며 카메라를 들이더니 찍은 것은 마당의 작은 풀과 작은 꽃, 그리고 아이들 모습. 아침저녁 이것저것 만들다가 다시 부수고, 다시 만들기를 되풀이했습니다.
어느 새벽, 전화 소리에 놀라서 달려가 보니 아이들이 우두커니 머리맡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어둡고 진한 밤 한 귀퉁이에서 고통스러운 발작에 홀로 맞서다가 잠든 아이들 이름도 불러보지 못하고 숨을 멈춘 그 사내의 차가운 손길. 한참 후, 감식반 경찰들이 이러저리 뒤집으며 사진을 찍는 그 사이로 그제야 조금은 여유로운 얼굴이 보였습니다. 책상 위엔 얼마 전에 산 카메라 렌즈가 다소곳이 있었습니다. 화장장에서 나온 후 그렇게도 아픈 마음으로 보듬어 안았던 아이들 손에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별 4.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면사무소인지 보건소인지 아무튼 갖다 줄 증명사진이 필요한데 사진 좀 찍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들꽃마당에서 하얀 벽을 찾아 구부린 허리를 좀 펴고 반듯하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지금 모습보다 조금 더 곱게 다듬어서 증명사진을 여러 장 만들어 드렸더니 소녀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사진을 찍는 일이 무척 기쁘게 느껴진 시간이었습니다. 이 증명사진을 다 사용하면 또 증명사진을 찍어줄 수 있느냐는 말씀에 오래오래 사시면 자주 찍어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그 한 장밖에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증명사진을 손에 쥐고 총총걸음으로 돌아가던 뒷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이별 5.
급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를 수화기 너머로 듣는 순간, 모든 것을 팽개치고 정신없이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구급대가 막 도착해서 육중한 덤프트럭에 깔려 찌그러진 스쿨버스의 문을 펴려고 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버스 주위를 돌며 이름을 불렀습니다. 스쿨버스를 운전한 그이의 이름을.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농촌학교의 폐교를 막고자 스스로 스쿨버스를 운전하며 아이들을 챙기던 그였습니다. 여전히 먼 길 마다치 않고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돌아가는 길 위로 갑자기 덤프트럭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의 꿈이 흔들렸습니다. 모두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례를 끝낸 후에도 충격의 시간은 무척 길었습니다. 홀로 길 위에서 꽃이 되고 별이 된 그리운 사람. 그가 갔던 길을 멈출 수가 없어서 오늘도 아이들을 태우고 학교 가는 길을 달리면 해맑던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별 6.
나름대로 자신 있었던 사내였습니다. 조금씩 가게를 늘리더니 드디어 읍내로 가게를 옮겼습니다. 길에서 스칠 때, 혹은 그의 가게에서 만나게 될 때마다 웃음을 잃지 않고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부족하지 않게 잘해냈습니다. 이렇게 가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특이한 병명이었습니다.
그 후의 시간은 빠르게 지났습니다. 곧 중환자실에 머물러야 했고 그것도 잠시뿐,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내는 아이들 손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별을 했습니다. 그의 몸에 부착했던 도구들을 제거하며 영안실에 빨리 연락하라던 젊은 의사의 말은 지금도 생각납니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늘 안쓰러웠던 아이들은 잘 자랐고, 먼저 결혼한 딸의 주례를 서면서 그와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당신의 자리는 늘 변함없다고, 아이들도 늘 당신 품 안에 있다고.
이별 7.
다 쓰기 어려울 정도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남편 장례를 치르다가 장례 준비를 하던 맏사위를 교통사고로 잃고 연이어 장례를 치러야 했던 나이 많으신 할머니의 모습도 너무나 아픕니다. 우울증으로 쓸쓸하게 새벽 산을 찾아가 그 언덕을 어루만지며 죽음을 택한 건장한 장년의 모습도 아픔입니다. 그 언덕은 앞으로 집을 지을 자리였습니다. 어느 새해던가. 함께 그 자리를 둘러보며 집터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모습이 선명합니다.
사고로 인한 죽음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논에 물 대러 갔다가 농업용 전기에 감전돼서 쓰러진 이가 있었습니다. 서둘러 비상등을 켜고 병원까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갔던 일이 생생합니다. 결국, 그렇게도 떠나지 못했던 논 옆의 흙이 되었습니다. 끄집어내면 참으로 구구절절한 얼굴들이 눈앞을 스칩니다. 아, 다들 지금은 평안하게 잘 계신지요?
이별 기억 1.
돌아서면 다시 바람이 불고 흙이 날립니다. 누군가 살아 있다는 것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죽음 뒤에는 그를 거두는 손길과 그에 대한 기억이 필요합니다. 어떤 위로와 눈물로 한 사람의 삶을 담을 수 있을까요? 오직 치열하게 살다간 당신의 삶이 스스로 당신을 위로하리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떠날 준비를 하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아무래도 농촌은 떠날 준비를 하는 이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들이 지내 온 사연을 듣노라면 그런 세월이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시큰거립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나누면 지금 다시 만나는 삶이 버겁지만은 않습니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고 자신을 보듬습니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지금 나보다 더 짧게 살다가 제주도에 모든 것을 묻은 사진작가 김영갑(루게릭병으로 2005년 사망)은 ‘운명을 받아들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음, 기자 양반이나 나나 지금 이 순간 내일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차이라면 당신의 내일이 올 가능성이 99%라면 내 것은 1%뿐이라는 거지. 그래서 나는 더 치열하게 살아야지”라고도 말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사연으로 이별을 대할지 모르지만, 이별 앞에서 우리 또한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는 날의 무게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치열하게 살아야 죽음 앞에서 부족한 삶이어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나뭇잎이 저렇게 떨어지는 것도 그 또한 치열하게 살면서 이제 마지막 한 줌의 힘까지 쏟았기 때문이겠지요. 거센 비바람에 먼저 떨어진 잎도 있고, 찬 서리 맞으며 한참 지나 떨어진 잎도 있지만, 나무는 그 잎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를 새잎들에게 내놓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