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기 전에 단장 겸해서 머리를 손질하려고 미용실에 갔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거울을 보는데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뜻밖에도 까치 새끼가 미용실 내를 활보하며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미용실 주인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의 말이, 며칠 전에 군산 월명공원에 놀러갔는데 갑자기 까치 새끼가 다가오더니 자기 몸으로 기어오르더란 것입니다. 길을 잃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나뭇가지 위에 올려주니 다시 내려와서 또 몸으로 다가오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할 수 없이 미용실까지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면서 사진을 찍는데, 주인에게 가까이 다가간 까치 새끼는 마치 어미를 만난 듯이 입을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조릅니다. 손가를 펴주니 그것을 입에 넣고 빨아먹습니다. 야생의 새가 그러고 있는 것을 보니 참 신기했습니다. 식성이 엄청 좋아서 먹이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는답니다.
지난번 들꽃축제 때 들꽃마당공동체의 최정순 씨가 가지고 온 여러 꽃을 보면서 교
감(交感: 서로 접촉하여 따라 움직이는 느낌)에 대해 생각을 했는데, 미용실에서도 그런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그날도 최정순 씨와 꽃들 사이에는 다른 사람은 쉽게 누리지 못하는 교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어떤 꽃이든지 최정순 씨의 손에 가면 싱싱하게 커가는 모습이 그동안 참 신기했습니다. 제가 꽃을 잘 돌보지 못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최정순 씨의 집에 갈 때마다, 그리고 축제 때 가지고 나오는 꽃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단순히 관리만 해서 꽃들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손길과 꽃 사이에 즐거운 교감이 이뤄져야 키우는 이도, 꽃들도 튼실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실, 꽃을 키운다는 것은 보기보다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에 꽃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환경 조건이 자기와 맞아야만 자랍니다. 그래서 예쁘다고 야생의 꽃을 캐서 집으로 가져오면 대체로 키우는 일에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최정순 씨는 그렇게 죽어가는 꽃들도 거의 살려냅니다. 이야기도 주고받으면서요. 이런 모습이 제게는 신기할 따름입니다. 최정순 씨는 이렇게 꽃을 키우는 일이 뭐 어려울 게 있느냐고 하지만, 그러나 꽃과 교감이 이뤄지지 않으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용실에서 본 까치 새끼와 미용실 주인도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평소 미용실 주인이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면 까치와의 교감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평소의 꿈이 미용을 단지 상업적으로만 하지 않고,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는 마음으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산속이라든지 아무튼 사람을 일대일로 대할 수 있는 곳에서 밥도 같이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면서 머리를 자르고 싶다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의 모습을 진실하게 다듬어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입니다. 아마 까치 새끼가 그와 떨어지기 싫었던 이유도 그의 그런 마음과 교감을 나누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최정순 씨와 꽃의 관계도 그렇고요. 교감은 어떤 인위적인 설정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과 수목원에서 토끼풀로 손목시계와 반지를 만들어 주는 놀이를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작은 손들이 토끼풀로 서로 시계를 만들어 주고 반지를 만들어 주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진지했습니다. 영국 옆에 있는 아일랜드라는 나라는 토끼풀이 나라꽃이라고 합니다. 이는 433년 패트릭이라는 분이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할 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면서 잎이 세 개 달린 토끼풀에 빗대어 성부와 성자, 성령을 소개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라는 군요. 아마도 아일랜드 사람들은 토끼풀을 통해 짙은 녹색이 주는 생명에서 그 근원과 교감을 느꼈으리라 여겨집니다.
작은 풀 하나에도 생명의 힘이 있고, 그 생명은 서로 연결합니다. 아이들도 장난스럽게 토끼풀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토끼풀로 서로를 연결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작은 손가락과 손목에서 빛나는 토끼풀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교감(交感)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과의 교감, 사람과의 교감, 그리고 스스로 누리는 교감. 이 교감이야말로 공동체를 이루는 근본이고, 사회에서 공동선(共同善)을 이루는 근본이지 않을까요? 교감의 올바른 모습은 무엇보다도 생명존중에 기반을 둡니다. 이기적인 이익 추구 앞에서는 생명도 힘이 없어지기 때문에, 생명존중을 우선하지 않으면 올바른 교감을 할 수 없습니다. 나쁜 일에도 교감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손목에 달린 토끼풀을 봅니다. 잘 매달린 것도 있고, 조금 헐겁게 매달린 것도 있지만, 자연과 친구가 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숲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달음질 바람에 꽃들이 흔들거립니다. 꽃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씨를 날리면서 자신을 퍼뜨립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말하지는 않지만, 건강한 생명을 누리는 즐거움 속에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까치 새끼를 보면서 든 생각이 이렇게 길게 이어졌습니다. 어쩌면 까치 새끼와 나도 이미 교감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입을 벌리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먹이를 가지고 까치 새끼를 보러 다시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