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모 가로지르는 산길을 지나 바닷게 헤집은 갯길을 따라 작은 농촌학교를 실어 나른 지 4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길마다 농촌학교와 아이들의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꽃처럼 피어났습니다.
2009년 통폐합 시점을 지나서도 여전히 통폐합 대상학교 1순위를 달리고 있지만, 시들지 않는 아이들 웃음소리에 그동안 낡은 15인승 승합차는 스스로 힘을 내 아이들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습니다. 매끄럽지 못한 길 위에서 이런저런 고생을 한 승합차가 안쓰러운지 이번에 지자체 시의회에서 새로운 차량을 농촌학교에 지원했습니다. 새로운 차에 대한 반가움보다도 그동안 수고를 뒤로 한 채 퇴역해야 하는 차에 대한 애틋함이 더 컸지만···.
이번에 바뀐 승합차는 그동안 고생했던 차와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네비게이션 장착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네비게이션은 차량자동항법장치로서, 차가 가는 길을 안내해주고 도와주는 기계장치입니다.
늘 가던 농촌 길이야 네비게이션이 없어도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이왕에 장착된 네비게이션을 보면서 갈 때가 많아졌습니다. 화면에 나타난 주변 마을 이름들을 보노라면 그 다정한 이름에 새삼스런 반가움이 가득 차오릅니다. 확실히 이름은 그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새로 바뀐 차 앞에는 길이 두 개가 나타납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과 네비게이션 화면에서 보여주는 길입니다 .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눈앞에서 그림을 보여주며 안내해 주는 길이 있다 보니 그것에 더 끌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내가 능동적으로 가기보다는 수동적으로 길을 따라가는 느낌이 듭니다.
문제는 아이들과 함께 가는 길 상당 부분이 산길과 농로, 그리고 바닷길이라는 것입니다.
네비게이션 바닷길에서는 파란 바탕 위에 홀로 둥둥 떠다니다가, 산길과 농로에 들어서면 갑자기 네비게이션에 길은 없어지고 온통 하얀 화면에 내 표시만 있습니다. 아니, 내 표시려니 짐작할 뿐입니다. 화면을 바라보면 마치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가고는 있지만 가야 할 길이 없어져버린 느낌이 강하게 밀려옵니다.
우습게도 그만 네비게이션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네비게이션에서 길을 잃어보셨나요? 묘한 느낌이 나를 감싸며 스멀스멀 기어오릅니다. 아, 이렇게 길을 가면서 길을 잃어버리다니···.
이것은 가끔씩 안개를 헤치며 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안개 속에도 길은 있기 때문입니다. 네비게이션 시대, 예측 가능하고 가는 길이 분명하다고 인지하는 시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길은 없는 길일 수 있습니다. 농촌의 길을 네비게이션에서 찾으면서 점점 지워지는 농촌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비록 표시되지 않아도 가냘프지만 많은 작은 길들이 서로를 연결하고, 그 길 위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역동적인 일들로 건강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큰 삽질로 큰 길을 만들어야만 살아가는 방도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의 작은 핏줄들이 생명의 바탕을 이루듯이, 작은 길을 통해서 작은 아이들이 학교에 오고 그래서 작은 학교가 농촌의 숨구멍이 되고, 또다시 작은 길 위로 분주한 농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져 우리는 작은 식탁 위에서 풍요로움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길이 없음’으로 표시되지만, 언젠가는 우리 사회의 네비게이션에 생명의 길 농촌의 길이 다시 나타나리라는 가냘픈 희망을 품으면서 그때까지 우리 스스로 이 길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작은 학교 문은 늘 열려 있고, 농업이 살아나고, 끝내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이 길을 우리는 힘껏 안고 계속 가야 합니다.
여전히 네비게이션은 산길과 농로에 들어서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길을 지워버리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의 네비게이션은 자동으로 켜지면서 흔들림 없이 가야할 길을 보여줍니다. 낭랑한 목소리도 들려주면서 말이지요.
“전방에 아이들 발자국을 따라서 희망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세요.^^”
그 길을 따라 갑니다. 찔레꽃 무성하고 애기똥풀 하늘거리는 사이사이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해맑게 피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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