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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프랑스 정신을 '똘레랑스'(Tolerance)라고 합니다... 작금에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지만 말입니다...우리나라 말로는 '관용'이라고 해석하는데, 좀 더 사족을 붙이자면 '나와 다른 남을 허용하고 관용하는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똘레랑스'란 단어는 홍세화씨가 쓴 '파리의 택시기사'란 책으로 인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그런 저런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홍세화씨의 책을 보면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이다. 흔히 말하듯 한국 사회가 정이 흐르는 사회라면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정신이 종류만도 3백 가지가 넘는 치즈를 먹을 정도로 개성이 강한 프랑스인들이 서로 함께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라고들 보는 것입니다.좀 더 구체적으로 '똘레랑스'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입니다. 즉, 상대방의 정치적 의견, 사상, 상대방의 이념 등을 존중하여 자신의 사상, 이념도 인정받는 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똘레랑스'는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를 상대방이 하나의 의견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할 때 쓰는 단어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견해를 인정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가령 내가 한 주장이나 의견이 타인에 의해 비판 받았을 때 그 상대방에게 당신은 '똘레랑스'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타인의 비판마저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고가 '똘레랑스'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냉정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냉정한 합리주의가 '똘레랑스'의 본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처음 예수 공동체는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허용과 관용의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들 가운데는 어부나 농부도 있었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 같은 부자나 니고데모와 같은 지도자, 그리고 백부장 고넬료와 같은 로마인도 있었지 않습니까? 심지어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분류되던 세리나 창녀, 심한 피부병 환자들도 있었고요...
겉보기에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여행하는 모습은 놀랍고 신기하기까지 보입니다.. 이들의 기대와 목적 또한 다 달랐을 텐데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예수 공동체는 많은 갈등이 내재된 채로 형성된 공동체였지만, 그 수많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 허용과 관용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전통이 이어져간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강력한 무력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작고 보잘 것 없는 에베소 교회 뿐 아니라 이름도 없는 여러 교회들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그러나 기독교가 제도화되고 교리화 되면서 소위 정통을 지킨다는 이름하에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상이나 믿음, 신앙의 색깔이 있으면 배제되기 시작했고, 불행히도 오늘 우리들 속에서도 그런 그림자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잔혹한 전쟁들의 바닥에는 관용은 얼씬도 하지 못한 채, 오직 배제정신만이 깔려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이것은 오늘 이 땅에서 우리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비극이 되기도 합니다. 자신과 다른 남을 관용하지 못하고 배제하는 이 모습은 어떻게 보면 악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한다면 서로가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바로 당신을 말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초대교회의 정신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머리로 하고 한 몸이 된 그 정신입니다. 서로의 모습과 생각이 너무나도 다르지만, 예수 안에서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가 처음 교회가 보여 준 모습을 잘 되살릴 수 있다면, 그러면 로마제국도 무너뜨리지 못했던 초대교회의 힘이 우리들 속에서 부활하리라고 믿습니다.
'똘레랑스', 낯선 말이지만 친숙해 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