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가 들어서서 청문회 후유증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청문회를 통해서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들의 비도적적인 모습들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법을 집행하는 대법관과 법무부 장관, 그리고
얼마 전 검찰총장 후보자마저 개인적 이익을 달성하려고 행한 위장 전입을 비롯한 불법 자행과,
관행에 의했다고는 하지만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행위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주창하면서 고위 공직자가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군요.
보통 시민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더 많은 명예와 사회적 기회를 가지고 있는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왜 이토록 탐욕스러운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오직 경제 발전만을 위해서 무작정 달려오다 보니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제법 있지만,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염치가 있었다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먼저 청문회를 했겠지요.
정말 염치없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염치, 청렴한 염(廉) 부끄러워할 치(恥).
사전적 뜻으로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염치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정말 염치가 없어도 되는 것일까요?
염치없는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요?
남을 딛고 얻는 안정된 미래를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가 갈수록 걱정이 됩니다.
한편으로 또 생각해 보면 염치없기는 고위 공직자들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도 예외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농민은 땅에 대해서 염치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어부는 바다에 대해서 염치가 있어야겠지요?
자연과 환경에 대해서는 자연스러운 염치가 있어야 합니다.
또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 이웃에 대해서 염치가 있어야 합니다.
염치는 어떻게 생길까요?
그것은 바로 배려에 의해서 생깁니다.
내 생각과 욕심을 제어하기가 참 어렵지만, 그러나 나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는 사람이 생겨나는지를 헤아려봐야 합니다.
아픔을 주면서 과연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삶의 우선순위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배려가 살아나고 염치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염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