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가을은
푸른 하늘, 푸른 바다, 푸른 배추가 어우러지는 계절입니다.
길 가 코스모스 하늘거리고, 돼지감자 노란 꽃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제풀에 지치면, 하늘보다 바다보다 배추 냄새가 더 짙푸르러 지고
배추 한 포기마다 농부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깁니다.
지난 봄, 모처럼 배추 값을 좋게 해주셔서
오랜만에 부드러워진 흙더미를 맘껏 풀어 헤쳤다고
이 가을도 저렇게 높은 하늘만큼은 아니어도
그저 불편한 허리 좀 펴고 웃을 수 있게 값을 쳐달라고
구구절절 간절함을 담습니다.
지난여름부터 배추 모종을 심고 포기마다 손길을 더하면서
그 위에 때론 물 대신 땀과 눈물을 쏟았습니다.
원래 이 땅 어디에서든 농부들이 농사지어 거두는 먹을거리는
씨앗을 보듬고 싹을 틔우고 키우는
하늘과 땅과, 그리고 사람의 힘이 결합된 결과물입니다.
하늘의 조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온갖 애씀이 다 소용이 없지만
세상에는 갈수록 하늘의 조화를 막는 일들이 많아지니
애타는 가슴 속은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배추 마을인 우리 마을
배추 자라는 동안 하늘 바라보며 땅 바라보며 손톱 닳도록 일하지만
이 모든 열심이 힘든 가슴앓이로 끝나는 것은 아닌지
인건비는커녕 행여 갈아엎게 되는 상황은 오지 않는지
가을 내내 배추밭 곳곳에서 새 나오는 근심은 주워담기도 벅찹니다.
언제나 기다리는 것은 중간상인 발길
반가움 반, 불만 반.
가격 결정권이 없는 농부들 손을 떠난 배추는
중간상인의 마진 외에도 운송비, 수확비, 상하차 비용, 경매비,
쓰레기 처리 비용이 붙고 도매상과 소매상도 마진을 남긴 다음
여러분 식탁으로 향합니다.
유통과정이 줄어들수록 식탁도 더 즐거워지겠지요.
배추는 우리나라 농산물 중
과잉생산과 수확량 감소를 번갈아 가면서 하는 대표적인 작물입니다.
아마도 내버려진 시장원리 속에서 늘 불안한 농부들의 심정이
어떻게 배추 농사를 지어야 이 배추가 정말 건강한 먹을거리가 될까
그런 생각 보다 앞서다보니 도무지 생산량의 감을 잡을 수 없겠지요.
먹는 일이 가장 먼저인 우리의 식탁에 친근하게 놓여야 할 배추가
때로는 너무 비싸서 사먹지 못한다거나 혹은 너무 싸서
밭에서 갈아엎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략적으로 신토불이를 말하기에 앞서,
우리가 제대로 밥을 먹고 김치도 먹어야 한다면
건강한 먹을거리를 함께 만들어 가는 적극적인 관심도 필요합니다.
배추를 중간상인에게 밭떼기로 넘기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좀 억울한 마음도 듭니다.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정성껏 가꾼 배추들은 정도 많이 들었습니다.
중간상인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겠지만
그래도 그 더운 날 미생물퇴비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고
배추 한 포기 마다 이름표는 달지 못했어도
마치 이름이 있는 양, 불러가며 가까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큽니다.
그래도 위안을 받는 것은 누군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 배추를 먹는 이도 이것이 어떤 배추인줄은 모르겠지만,
그의 입을 통해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
농부의 마음이 그 속에서 다시 살아날 줄 믿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내 사람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금으로 절임배추도 만듭니다.
뻣뻣한 놈들이 푹 절여져 나오면 그리도 겸손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키우는 이는 원래 겸손해야한다는
하늘의 소리를 절임배추를 통해서 또 듣습니다.
천상,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농부의 마음이
배추 한 포기를 통해서라도 여러분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또 다른 소망으로 오늘도 배추를 어루만집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동네 가을은
푸른 하늘, 푸른 바다, 푸른 배추가 더 어우러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