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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진전
그러니까 2006년 12월이었던가요, 마을 주민들 요청으로 읍내 식당에 함께 모여 학교에 대해 논의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제법 지났습니다. 오랜만이지만, 며칠 전부터 마을 학교인 낙동초등학교 사진을 다시 찍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12월쯤 사진전을 하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학교 아이들보다 이런저런 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난 흔적들이 쌓여 있는 곳을 찾아서요. 낙동학교는 올해 다시 통폐합 절차에 들어가면서 이제 마을 역사의 한 쪽을 장식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2006년에도 통폐합 통지가 왔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다들 지금보다 젊었고(?), 마을 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통폐합 소식이 충격이기는 했지만, 버리지 않은 희망이 있었기에 여러 마음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썼던 글들이 지나온 내용을 담고 있기에 중간중간 인용합니다.
「작년 연말에 읍내 식당에 모여서 학부모 회의를 하는데, 학교의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상당수의 학부모가 이럴 바에는 아이를 읍내 학교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저도 1학년에 들어가야 할 딸이 있어서 관심 있게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각설하고, 결론은 이렇게 났습니다. 제가 학교가 마을에 있어야 할 당위성과 우리가 꾸밀 수 있는 교육 환경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교회도 돕겠다고 하자 이에 학부모들이 동조해서 우선 교회에 속한 인적 자원으로 낙동학교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함께 이야기 나눈 것은 우리 학교가 농촌 학교지만, 읍내 학교에 비해서 교육 내용이 우수(?)하고 자연환경도 좋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한다면 오히려 외부에서 우리 학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들이 좀 더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춰주자는 것이었고, 일단 요즘 다들 하는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을 우리가 직접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 아내를 피아노 선생님으로, 한문을 제대로 배우신 이원갑 교우를 한문 선생님으로, 올해 서울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원현정 자매를 영어 선생님으로 파송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날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수업을 하고, 또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꽤 있어서 그 아이들에 대한 배려도 했습니다. 비용 문제는 동창회가 최선을 다해서 도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과 약속한 것은 부모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챙긴다는 것이었습니다.」 <*01-2007년 8월 작성 글>
고맙게도 학교는 희망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학교 운영에 대해서 선생님들과 의논도 하고, 방과 후 학교 운영에 마을 주민들의 즐거운 참여를 이끌었습니다.
「문제는 차량 운행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읍내에 있는 학원 차량을 이용해서 집에 가곤 했는데,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차량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농사일에 바쁜 부모 입장에서 아이들 귀가를 일일이 챙겨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난감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올해 학교 병설유치원에 들어올 아이들이 모두 4명인데, 그중 세 명은 차량 운행을 하지 않으면 읍내 학교로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없으면 그나마 내년에 들어올 아이들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원(?)을 했습니다. 스쿨버스 기사를 하겠다고.
그래서 아침에 1시간, 오후에 1시간씩 꼬박꼬박 운전합니다. 교회 차량이 12인승과 15인승 두 대가 있어서 오후에는 제 아내가 같이합니다. 저는 먼 거리를, 제 아내는 가까운 거리를 운행합니다. 두 시간 이상 피아노를 가르치고 운전까지 하는 아내를 보면 안타까움도 있지만, 보람을 누리는 모습은 제게 많은 위안이 됩니다. 그렇지만 농촌 세미나라든지 학교 강의라든지 제가 빠지는 그런 날은 모든 수고를 안아야 합니다.」 <*02-2007년 8월 작성 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오고, 집에 데려다주는 일은 시간에 쫓기기는 해도 아이들이 조금씩 늘어나니 즐거웠습니다. 여전히 긴장감은 남아 있었고요. 1학년 입학 예정 아이들 가정을 방문해서 부모들과 자녀 교육을 위한 여러 이야기를 나눈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스쿨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보령시 천북면 낙동초등학교가 지난 12월 21일(금)부터 겨울방학에 들어갔습니다. 비정규직(?)이라서 방학하면 일자리가 없어져서 허전합니다. 사실 그동안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일정이 겹칠 때도 있어서 힘도 들었는데, 막상 쉬려고 하니 아이들 하나하나 눈에 아른거립니다. 돌이켜보면 일 년이 금방 지나버린 것 같습니다. 일 년 전 꼭 이맘때, 학교 통폐합 소식에 불안해진 학부모들이 절박하게 회의하고 마음을 모으는 과정에서 제가 해야 할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학교를 살리자는 일념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올해 1학기를 45명으로 시작했는데, 2학기를 마칠 때는 52명의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앞으로 일 년간 일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학기 때 새로 오신 교장 선생님과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학부모들과 함께 2008년 교육 과정에 대한 브리핑도 받았습니다. 교장 선생님도 교회와 지역의 협력에 상당히 고무되어 있어서 의욕적입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운 동창회도 여전히 든든한 힘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6학년 졸업생보다 1학년 신입생의 숫자가 부족한 것입니다. 6학년은 9명인데, 신입생 예정자는 5명입니다. 그나마 1~2명은 아직 입학 결정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신입생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 1학년이 6명이어서 신입생이 최소 5명이 되어야만 합반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50명 이상이 돼야 통폐합 대상 학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참 간당간당합니다.」 <*03-2007년 12월 작성 글>
그러다가 작은 사진전을 처음 열었습니다. 사진 찍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사진으로 마을과 학교 소식을 구체적으로 전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의무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진은 그 후로도 중요한 도구였고, 개인적으로는 이후 아마추어 사진가로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사진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일 년에 한 번씩 마을 축제 때 들꽃사진전을 열었지만, 판매는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분들에게는 사진을 그냥 나눠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사진 판매를 해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지난 일 년 동안 아이들을 데려다주면서 담았던 천북 바다와 천북 들꽃 사진을 가지고 천북굴단지에서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사진을 판매하려고 하니까 손이 가는 부분이 많아서 12월은 참 여러 가지로 바빴습니다.
축제라고 하지만 태안 기름 유출 사건 여파로 사람이 별로 없어서 과연 얼마나 팔 수 있을까 우려 속에 12월 15일, 16일 이틀간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모두 50점 정도를 출품해서 40점을 팔았습니다. 계산해 보니 인화료 액자값 기타 수고비 등을 제외하고 50만 원 조금 넘게 수익이 생겼습니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액수였는데, 보잘것없는 사진을 사준 모든 분에게 감사했습니다. 특히 기름 유출 여파로 손님이 적어서 굴 장사가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당신들 바다 사진이라고 기꺼이 사진을 가게에 걸어준 분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덤으로 굴 음식과 칼국수도 대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동안 사진으로 인한 부수적인 수익들이 있었지만, 이번 사진 판매전은 그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 의미에 함께 하려는 분들의 모습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자칫 놓을 수 있는 희망의 끈은 언제나 이름 없는 이들에 의해서 지탱이 되는 것 같습니다. 태안 만리포 유출 기름 방제 작업 현장에서도 이런 힘을 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많은 기름 덩어리가 손길 하나하나에 의해서 조금씩 없어져 가는 모습은 큰 감동이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오히려 기쁨을 얻습니다. 저는 농촌도 그런 손길들이 살려내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작은 농촌 학교도 그렇게 살아나고요. 우리가 절대 놓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작은 것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면 어느 틈에 희망은 싹을 틔우고 메마른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운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04-2007년 12월 작성 글>
두 번째 사진전
마을에서 학교와 교감하며 함께 가는 과정이 참 즐거웠습니다. 문화예술에 관심이 커진 것도 좋았습니다. 낙동초등학교에서 합창 다큐멘터리 촬영 후, 아이들이 피아노와 더불어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가 생겨났고, 아이들 연주를 보면서 농민 오케스트라도 꿈을 꾸었습니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준비하면서 시간이 흐르자, 마을에 들꽃오케스트라도 생겼습니다. 농민들부터 시작해서 미장원 원장, 정육점 주인, 은퇴한 선생님, 귀촌한 분들이 모였습니다. 2018년에 창단을 했고, 얼마 전인 2014년 5월 넷째 주 토요일에도 정기연주회를 했으니까 잘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스쿨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보령시 천북면 낙동초등학교는 지금 합창 연습이 한창입니다. KBS한국방송의 농촌학교 문화 다큐멘터리 촬영지로 선정되어서 그 일환으로 합창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악보를 잘 읽지 못하는 아이도 있고, 피아노를 배워도 일 년 내내 도레미파솔라시도만 왔다 갔다 하느라고 바쁘기 그지없는 아이도 있어서 연습 시간이 마냥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도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열심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부르는지 목이 쉬어서 컥컥대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웃음도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가르치는 지휘자 선생님과 함께 진지하게 소리를 내려고 애쓰는 아이들을 통해 농촌의 희망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합창은 내가 소리를 내면서 다른 사람이 내는 소리와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합니다. 혼자 고래고래 목청을 뽑기보다는 남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가슴을 만들어줍니다. 마음을 열어젖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가 자유와 질서와 평화 속에 공존하면서 화음을 만듭니다. 아이들의 합창 소리는 통통 튀는 생명의 소리입니다. 들을수록 설레게 합니다. 아직은 서툴고, 아니 앞으로도 계속 서툴지 모르지만 저렇게 낭랑한 목소리가 우리 머리 위에서 맴돌고 있다면 그 누구라도 함께 노래 부르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저 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학교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늘 새롭게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꾸는 꿈은, 우리 농촌에 더욱더 풍성한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여전히 농촌을 지키고 있는 흙투성이 할아버지 할머니도 함께 손을 잡고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것입니다. 혹여 노랫소리에 이끌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시 돌아온 이들이 건강한 흙더미를 고르면서 함께 화음을 만든다면 그것은 농촌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05-2009년 8월 작성 글>
학교 살리기에 나서면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뜻하지 않게 이종철 동문회장이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함께 아이들을 데려오자면서 기증받은 24인승 차량으로 아이들을 데려오고 데려다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만 돌아오는 길에 육중한 덤프트럭과 부딪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모두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고, 그 슬픔은 지금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학교 교정에 그를 추모하는 비를 세우고 애통한 심정을 글로 담았지만, 너무나 큰 빚을 그에게 졌습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도 아니었고, 마더 테레사도 아니었던 그를 누가 이렇게 불렀는가? 그의 이름은 이종철입니다. 여전히 먼 길 마다치 않고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갑자기 달려든 육중한 덤프트럭에 밀려 그 자리에서 별이 되고, 꽃이 된 그의 이름은 이종철입니다. 마지막으로 내려 줄 아이는 그 와중에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몸으로 모든 고통을 안았습니다. 정신없이 달려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그는 한참을 부서진 스쿨버스 안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 터져버릴 것 같은 하늘이여!
마지막으로 교문을 들어서는 그의 길 위에 사람들이 섰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그의 길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마지막 작별을 고합니다. 국화 한 송이가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큰 선물을 그에게서 받았는데, 달리 우리가 그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손을 잡습니다. 이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에게 인사를 합니다. 우리는 늘 같은 길 위에 있다고. 당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의 전령사라고….」 <*06-2012년 3월 작성 글>
이렇게 여러 이야기가 모이면서 7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기쁨도 안타까움도 슬픔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마을이란 공동체 속에서 학교는 어떤 의미이고, 또 우리는 각자 일부로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부른 노래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을 데려오고 데려다주는 일이 힘든 일만은 아닌, 오히려 즐거움이 깃들어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3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7년의 순간순간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잘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그래도 7년이라는 시간이 머물러 있고 거기에는 아이들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7년의 순간과 아이들의 노래를 함께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소담하지만, 많은 사진 가운데 300장을 골라서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제목은 자연스럽게 ‘7년을 담은 희망의 노래’로 정했습니다. 2013년 12월 4일(수)부터 6일(금)까지 보령시 천북면사무소 2층을 급조한(?) 갤러리에서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07-2013년 12월 작성 글>
세 번째 사진전
그때 사진전 초청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습니다.
「낙동초등학교는 지난 7년 동안 산길, 바닷길, 논길을 걸어서 함께 가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굳게 붙잡고 허허벌판을 지나 숲길을 돌아서면서 희망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문이 열려 있는 학교에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멈추지 않도록 꿈꾸는 일 또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꿈꾸는 일에 사진기를 들이댔습니다. 2007년 3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7년의 순간을 담았습니다.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공연장에서, 하굣길에서, 산길 바닷길에서…. 그 많은 사진 가운데는 기쁨도 있지만, 슬픔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마저도 희망의 연속이란 것을 알기에 모든 사진을 모아서 낙동학교 아이들 사진전을 엽니다. 낙동학교 아이들을 한 번 봐주시면 기쁘겠습니다. 다시 용기를 내서 길을 가겠습니다. 농촌 공동체의 중심인 마을 학교에 아이들 소리로 가득 차는 일은 언제나 신나고 행복한 일이란 것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08-2013년 12월 작성 글>
이제 세 번째 사진전을 준비합니다. 학교가 통폐합되는 것은 마을에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함께 마음에 두기 위해 여린 공간과 그동안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사진전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진전 초청장에 실린 내용은 유효합니다. 이제는 마을이 학교가 되어서 함께 가는 길을 만들 것입니다. 다시 손을 잡고 허허벌판을 지나 숲길을 돌아서면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꿈을 꾸겠습니다. 마을에서 우리 노래가 이어진다면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