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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힘을 내야 한다고 여전히 부탁해꿈꾸는아이들 2023. 2. 10. 23:03
지난 2월 7일 저녁 7시 50분경. 서재 책상에 놓인 전화기 소리가 울렸습니다. 마침 이것저것 살피는 중이라서 무심코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수화기에서 조그맣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 저 익서예요.” 갑자기 마음이 저렸습니다. 익서의 전화는 늘 마음이 저립니다. 두어 달 전쯤인가, 겨울이 시작될 무렵 그때도 전화가 왔었습니다. “뭐 하니?” “내포에서 배달 일하고 있어요.”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잘 먹고 있어요.” “몸 관리 잘해야 한다.” “잘하고 있어요.” “배달은 힘들지 않고?” “할 만해요.” “집은?” “주공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아마 기초생활수급자여서 홍성군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듯했습니다. 임대아파트 배정됐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거든요.
그때와 비슷한 내용의 통화가 이번에도 이어집니다. “지금 어디니?” “내포요.” “여전히 배달 일을 하고 있고?” “네.” “힘들지 않니?” “할 만해요.” “그래, 다행이다.” “밥은 잘 먹고?” “잘 먹고 있어요.” “오냐, 네 목소리를 들으니 좋다.” “틈나는 대로 전화를 주렴.” “네.” “누나는 연락이 되고?” “안 돼요.” “…” “…” “그래도 누나를 찾아보렴.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네” 갑자기 주변에서 말소리가 커집니다. “배달 가야 할 것 같아요.” “오냐, 전화 자주 해라.” “네” “…”
올해 구익서 나이는 38살입니다. 85년생이니까요. 일하다가 쉬는 시간이면 제 생각도 나는 가 봅니다. 이렇게 가끔 전화 오는 게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전에는 잘못된 일로 감옥 한 번 다녀오고, 시간이 지나면서 돈이 필요하면 찾아오고, 잠잘 곳이 없으면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제 앞가림할 정도는 버는가 봅니다.
오래전입니다. 22년 전쯤 구익서에 대해서 쓴 글이 있습니다. 한 번 보여드린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저린 마음으로 글을 찾아 다시 읽으니 아픕니다. 그때 쓴 무척 오랜 글을 인용합니다. 익서가 앞으로 나이가 더 들어서도 여전히 전화하고, 때때로 마음 둘 데가 없으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늘 힘을 내고…
Ⅰ
"목사님, 아빠가 아파요. 여기는 홍성의료원인데, 더 큰 대학병원으로 빨리 가서 수술받지 않으면 아빠가 죽을지도 모른대요." 울면서 전화하는 익서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 익서 아빠가 병원에 언제 입원했었나? 왜 모르고 있었지?' 우는 익서를 달래는 한편,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 교회에 나와 있던 교우들과 함께 홍성의료원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며칠 전 늦은 밤에 술에 취해 익서를 찾겠다며 교회로 올라 온 익서 아빠가 생각이 났다. 마주 대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술에 취했으면서도 목사를 대한다는 생각인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익서가 어디 있는지를 묻더니 찾아보겠다는 말도 없이 곧장 광천(읍)으로 가겠다고 몸을 돌렸다. 마지막 버스가 지나간 지도 오래됐는데 집에서 쉬는 게 어떻겠느냐는 만류에도 걸어서라도 가겠다고 막무가내였다. 저렇게 혼자 놔뒀다가는 지나는 차에 치일 것만 같았다. 이 늦은 시간에 광천에 가서 어떻게 할 테냐는 물음에도 익서 아빠는 무조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광천까지 차에 태워 데려다줬다.
들리는 여러 이야기로는 광천파출소 순찰차와 119구급차가 익서 아빠의 단골 차량이라는 것이었다. 술에 취하면 무조건 길바닥에 드러누워 자버리는 통에 순찰차와 119구급차가 신고받고 익서 아빠를 태워 집에 데려다 놓는 것은 다반사고, 요즘엔 귀찮은 나머지 문밖에 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홍성의료원에 도착해서 의사를 만나보니 익서 아빠의 상태는 의외로 심각했다. 빨리 대학병원으로 옮겨서 수술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지난번 교통사고 수술의 후유증으로 장이 달라붙어 막혀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한 군데의 병원을 거쳐 오느라고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보호자라곤 어린 아들, 그나마도 상황인식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좀 더딘 익서이다 보니 의사도 혼자서 고민만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무조건 병원을 옮기라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막막했다. 옮기는 것은 좋은데 환자의 병구완은 어떻게 하며, 누가 보호자의 역할을 할 것인가? 익서 아빠의 형편으로 봐서는 그날그날 벌어서 술로 다 소비해 버린 것 같은데 얼마나 나올 지도 모를 병원비는 어떻게 감당할까? 아무튼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먼저 천안으로 취업을 나간 익서 누나 미숙이를 찾는 일이 당장 급했다.
미숙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천안에 있는 공장에 취업을 나가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익서 아빠는 아침 일찍 옮기기로 하고, 광천에 살고 있다는 익서 할머니와 멀리라도 친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락처를 찾기 위해 교우들과 함께 익서 집을 샅샅이 뒤졌다. 간신히 익서 누나인 미숙이의 연락처를 찾아내고는 아침에 천안 순천향병원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교회 업무 때문에 교회학교 선생님 한 분을 먼저 병원으로 보냈다. 새벽 일찍 홍성의료원에서 구급차를 타고 천안 순천향병원으로 익서 아빠를 이송했다. 문제는 재정 보증이었다. 휴대전화로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지금 익서 아빠는 너무나 위급한 상황인데, 재정보증이 되지 않아 수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증은 2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혼자서라도 보증을 서기로 하고 수술받도록 했다. 오후 늦게 병원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는 익서의 얼굴이 초췌하게 보였다.
Ⅱ
익서가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온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지금은 중학교 3학년이니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익서 엄마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익서가 어려서 가출했다는 이야기,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익서도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한 듯했다. 익서 아빠도 처음엔 동네일을 열심히 하였다. 동네 사람들도 건실한 사람이 이사를 왔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차츰 술에 빠지더니 생활이 엉망이었고, 같이 왔던 익서 할머니마저 광천으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간신히 연락했더니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익서 아빠에 대해서는 알 바가 아니라고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마을에서도 익서 아빠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더니 지금은 아예 관심 밖이 되고 말았다.
익서는 중학교 3학년인 지금도 글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다. 그러나 의사 표현은 성숙해졌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완전히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의 모습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그땐 익서 만의 문제가 아니고 농촌에 사는 모든 아이를 대상으로 한 고민이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문화 활동이었다. 모든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결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환경이라고 생각되었다. 열악한 농촌의 환경은 학교마저도 아이들의 재능을 살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맨 처음 시작한 것이 컴퓨터 교실과 피아노 교실이었다.
서울에 있는 삼성건설의 한 과장 집사님을 통해서 회사가 컴퓨터를 교체하고 남은 386급 컴퓨터 9대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신 급인 486 컴퓨터를 한 대 구입했다. 광천에 있는 전자오락실에서 배회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먼저 게임을 설치했다. 누구든지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했고, DOS 공부부터 차근차근 가르쳤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나부터 컴퓨터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난생처음 배우는 컴퓨터였지만 선생님 없이 혼자 배운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잊지 못할 선생님(?)은 공부를 위해 서울에 갈 때마다 들린 서울역 지하 서점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고마운 선생님이었다.
일주일간 컴퓨터에 대한 궁금증을 메모해 놨다가 월요일 오후엔 서울역 지하 서점 컴퓨터서적부에서 2시간 이상씩을 눈치 보면서 공부했다. 아이들이 겁 없이 컴퓨터를 다루느라고 컴퓨터는 늘 고장이 났다. 틈날 때마다 고치고, 또 중고 컴퓨터를 인수하여서 몇 가정에 주곤 했다. 그런 아이 중 몇몇은 이제 컴퓨터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피아노 교실은 집사람 담당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는 대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저녁 7시까지 이어졌다. 2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컴퓨터와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서 늘 교회학교로 왔다. 배움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먼저 배운 아이들이 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들락거리는 아이들로 인해서 교회가 늘 어수선해지자 교우들 간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아이들의 재능이 발달하면서 대외적으로 각종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오는 일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도 자녀 교육을 위해서 자녀들이 교회학교에 나가는 것을 스스로 도와주기도 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을 위해서는 지역 문화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토요일마다 지역 문화행사에 쫓아 다녔다. 여름엔 지역 내 공동체 수련회를 했고, 겨울엔 관광버스를 빌려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산재한 문화 체험 투어에 나섰다. 아이들이 유연해지기 시작했고, 발표나 표현능력이 성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즘은 도시교회 아이들과 연합행사를 가져도 오히려 더 능동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익서는 어려워하면서도 나름대로 그 흐름에 잘 참여했다.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학교 선생님이 글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잘 안되었다. 그래서 익서를 위해서 택한 또 다른 교육 방법은 사랑이었다. 교회학교의 여러 선생님이 마련한 따뜻한 겨울 잠바 하나를 통해서, 정성이 담긴 반찬 한 그릇을 통해서, 선배들이 물려준 교복이지만 정성껏 손질해 주는 사랑을 통해서 익서의 영혼이 잘 자라나도록 도움을 주려고 했다. 모든 행사에서도 결코 익서를 제외하지 않았고, 동일한 역할을 주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익서 한 사람을 위해서라기보다 익서와 같은 모든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요즘은 익서도 조금씩 읽기를 한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신앙으로 헌신의 훈련을 한 많은 이들의 힘이 익서를 비롯한 마을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서 모아졌다.
Ⅲ
아빠 때문에 마음고생을 무척 많이 한 모양이었다. 배시시 웃는 익서의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 더군다나 담임 선생님에게 어디 돈 빌릴 데가 없느냐고 전화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담당 의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는데, 재정 보증은 둘째 치고 우선 환자가 죽어 가는데 수술을 안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상태는 지켜봐야 하고, 다시 장이 달라붙으면 재수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익서와 익서 누나를 보니 답답해졌다. 아직도 어린아이들인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우선은 아빠를 병구완할 사람은 익서 뿐이었다. 익서 누나는 아빠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날마다 일이 끝나면 병원에 와서 익서와 아빠를 돌보기로 했다. 피곤하고 힘든 일이지만 아빠는 너무도 소중한 분이기 때문이다.
익서 아빠를 돕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마을 이장도 맡고 있는 장로님을 통해서 면사무소와 마을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의외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술주정뱅이를 누가 돕느냐는 것이었다. 교우들도 그런 생각이 있는 분이 여러 사람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익서 아빠를 도와야 할 당위성들을 이야기했다. 아직도 마을의 분위기는 차가웠지만, 그러나 교우들 가운데는 힘이 닿는 대로 돕고 싶다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성교회에서는 이단이라고 멀리하는 안식일교 사람들도 몇몇이 찾아왔다. 익서 이야기를 듣고 돕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마음이 고마웠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그 사랑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전체 교우들의 의견을 모아 익서 아빠를 돕기 위한 구제헌금을 했다. 생각보다 많은 헌금이 모아졌다. 물론 앞으로 나올 전체 병원비에 비하면 부족한 액수겠지만 어려움을 겪는 농촌의 현실에서 참으로 많은 사랑이 모아졌다고 생각되었다. 부족한 것은 계속 사랑이 쌓이면 채워지리라 믿는다.
요즘 익서 아빠의 상태가 좋지 않다. 익서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빠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아무래도 수술을 다시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의기소침해 있을 익서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지금까지 잘 견뎌 온 것처럼 익서는 앞으로도 잘 견디리라고 생각한다. 익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힘내라, 구익서!”이다. 지금은 익서가 아빠의 든든한 보호자이다. 보호자가 힘을 잃으면 환자도 힘을 잃게 된다. 아빠는 회복하면 분명히 세상을 다시 볼 것이며, 새로운 힘을 갖고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더 따뜻한 아빠로서, 그리고 많은 사람의 신뢰를 얻는 아빠로서 힘 있게 살게 될 것이다. 아빠의 손을 잡고 씩씩한 발걸음 내딛는 그때까지 익서도 힘을 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후로도 홍성의료원 원무과에서 가끔 전화가 왔습니다. 익서 아빠가 입원했다가 퇴원해야 하는데, 입원비 치료비를 내지 못하니 내달라고…. 광천읍 파출소 차도 가끔 교회에 오기도 했습니다. 5년 전인가 익서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참을 먹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익서는 몇 곳을 떠돌다가 임대아파트에 들어갔습니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다행입니다. 익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저는 기도할 뿐이지만, 그래도 제 자리가 익서의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자리, 익서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자리로 계속 남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