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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곳은 걷고 싶습니다. 걷고 싶은 곳은 좋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 그런 곳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많아졌습니다. 올여름에 서울에서 그런 곳을 걸었고, 가을 초입에는 광주에서 그런 곳을 걸었습니다. 봄부터 자주 가는 곳은 당진 면천읍성입니다. 오래된 시간이 여전히 자리하고, 구부러진 작은 길도 왜소하지 않은 곳입니다.
면천읍성은 1439년, 세종 21년에 평지에 쌓은 평지 읍성인데,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봐서는 크지 않고 참 소담한 성입니다. 면천에 읍성이 있었던 것은 이곳이 1914년까지 당진에 버금가는 주요 군(郡) 소재지였기 때문이었는데, 면천이 1914년 이후 행정 개편으로 당시 당진군에 편입되면서 현재도 당진시에 속한 면천면으로 있습니다.
면천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두견주(杜鵑酒)입니다. 충남에서 알려진 술을 꼽자면, 지금이야 장인 정신으로 지극정성 빚어 올린 술이 곳곳에 있지만 아무래도 한산 소곡주와 면천 두견주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손을 대면 도무지 일어날 수 없다고 해서 한산 소곡주는 앉은뱅이 술로 이름을 날리고, 진달래꽃 빛깔이 녹아들어 황갈색을 띠는 면천 두견주는 봄날 정감이 온몸을 감싸는 애틋함으로 다가옵니다.
2. 면천 두견주에는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 장군의 일화가 녹아 있습니다. 복지겸은 통일신라 후기에 당진 면천을 중심으로 서해(西海)에서 위세를 떨쳤던 해상호족 세력으로 추측됩니다. 복지겸의 선조인 복학사(卜學士)가 당나라에서 바다를 거쳐 신라로 넘어오는 과정에 해적들을 소탕하고 백성들을 모아 보호했다고도 합니다.
복지겸은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마군장군(馬軍將軍)이었습니다. 그러나 궁예가 포악무도하여 민심을 잃자, 918년 배현경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해 고려를 세우면서 그는 고려 태조가 지정한 1등 개국 공신 4명 중 한 명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복지겸은 고려 개국 후 얼마 안 돼 중앙정계에서 사라집니다. 그 이유가 면천 두견주와 관련된 와병(臥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야기에 따르면 복지겸은 건강이 나빠져 면천에 와 휴양을 하지만, 그 어떤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고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의 딸 영랑이 매일 같이 아미산에 올라 100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100일째 되던 날 영랑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아미산에 활짝 핀 두견화와 찹쌀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의 물로 빚고, 100일이 지난 다음 이를 아버지께 마시게 하고,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들여야 나을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이에 영랑이 그 말대로 술을 빚고 은행나무를 심어 지성을 다 하자 복지겸은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진달래꽃, 안샘, 은행나무 등은 차근차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습니다.
3. 면천읍성 안에는 골정지(저수지)가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말년에 면천 군수를 약 3년간 지내면서 읍성 안 저수지를 정비하고, 저수지 중앙에 초가를 얹어 정자를 지었습니다. 정자에는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초정’이라는 의미입니다. 건곤일초정은 두보의 시 구절에서 따온 말로, 이 구절을 좋아한 북학파 친구 홍대용을 생각하며 붙였다고 합니다. 골정지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은 미술관 뒤편으로 난 대나무 숲길을 거닐며 가는 길입니다.
면천읍성 이야기는 천 년을 지나서도 이어집니다. 오늘 면천읍성을 걷고 싶도록 만든 여러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면천읍성 안에 있는 미술관인 ‘면천읍성안 그 미술관’ 김회영 관장입니다. 미술관 이름이 재미있어서 물었더니 특별한 뜻보다도 성안에 있는 그 미술관이라는 생각을 이름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미술관이 생기면서 면천읍성 마을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면천읍성 마을이 지금의 분위기를 갖춘 것은 몇 년 되지 않습니다.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은 2017년에 개관을 했습니다. 미술관 건물은 원래 면천의 두 번째 우체국이었습니다. 김회영 관장은 면천이라는 동네가 주는 멋스러움과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 좋아서 공매로 나오기까지 5년을 기다려서 매입했습니다. 1층은 기존 우체국 업무를 보던 곳, 2층은 교환실, 뒤편 건물은 집배실, 우체국장 사택 등 시골에서는 상당히 큰 공간인 이곳을 미술관으로 만들면서 면천에 오는 이들이 좋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위로를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술관은 문을 열면서 역량이 있는 작가들에게 초대전을 통해 전시하도록 대관을 시작했습니다. 또 작가로서의 역량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하여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4. 면천은 시간 여행을 하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천 년 은행나무 곁을 지나서 객사(客舍) 앞에 이르다 보면 많은 시간이 한데 모여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넓지 않지만, 오히려 농축된 세월의 질감이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줍니다. 두견주 이야기도 했지만, 면천은 막걸리도 물맛 따라서 맛이 깊습니다.
작은 길 따라 조금 걸으면 공출판사, 책방 오래된 미래, 진달래상회가 나란히 눈에 들어옵니다.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과 인연으로 이어지는 곳들입니다. 예쁜 공예 소품 상점인 진달래상회는 윤미경 대표의 낭랑한 목소리부터 친근감이 물씬 솟아오릅니다. 윤미경 대표는 그 미술관에 왔다가 면천이 좋아 정착했습니다. 책방과 미술관을 오가며 지내다, 바로 옆 옛 막걸리 집을 빌려 진달래상회를 냈습니다. 윗길에는 100여 년 전 면천 첫 번째 우체국 건물을 개조한 카페 미인상회(米人相會)가 있습니다. 미인상회는 100여 년의 풍경을 안고 있으면서 면천의 레트로 감성을 만드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윤미경 대표 말을 빌리면 “이곳 가게들은 서로가 도와 개업했다”면서 “토박이 주민들이 단골인 것도 특징”이라고 합니다. 읍성 밖에서 파스타집인 덕부엌을 낸 이덕순 대표는 마을 소식지 창간호에 주민들 도움에 고마움의 글을 싣기도 했습니다.
5. 책방 오래된 미래가 자리한 건물은 지붕이 기와인 2층 양옥으로 오래된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책방 건물은 원래 자전거포였습니다. 오래 비워둔 건물이 마을을 대표하는 책방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2019년 1월에 문을 연 작은 책방은 마음 따뜻하고 부지런한 지은숙 대표에 의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정겨운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면천의 오래된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새로운 미래를 지향한다는 의미로 책방의 이름을 지었다고 말합니다.
면천은 아이들을 데리고 역사 공부를 위한 답사를 오면서 알게 되었고, 책방을 하고 싶은 꿈이 부풀어 올랐을 때 오랫동안 비어있던 이 건물이 그동안 꿈꾸었던 책방의 모습이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책방 이름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작가가 쓴 《오래된 미래》를 좋아해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름만 정해지면 당장 책방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책방을 열기 전부터 이름에 대해 가장 고민이 많았는데, 결정하고 나니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이 마을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답니다.
저도 199년대 초반에 故 김종철 선생을 통해 이 책을 알았고, 여러 번 읽으면서 책 내용을 토대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책방 모습이 처음부터 낯익은 이유가 그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방을 좋아하는 이유는 충남 서해안 지역 책방 중 사진예술에 관한 책이 가장 많다고 할까? 미술책들도 그렇고, 인터넷 서점이 아닌 이 지역 오프라인에서 가장 편하고 쉽게 예술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책방입니다. 면천읍성 산책은 골목 사진 촬영과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는 일이 당연히 어우러지게 되었습니다.
요즘 책방은 어른들이 읽는 그림책 공간을 확보하는데 좀 더 신경 쓰고 있는데, 그림책에 대한 손님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엄마나 여성이 위로받을 수 있는 책,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그림책을 손님들도 좋아한다고 지은숙 대표는 말합니다.
6, 면천읍성을 걸으면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1953년에 발표한 동화 《나무를 심은 사람》이 떠오릅니다. 개인적으로 이 동화는 원작보다 1987년 캐나다의 애니메이션 감독 프레데릭 백이 제작해서 이듬해 아카데미상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은 영상으로 더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우리말 내레이션을 입힌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정가 2만 원에 판매하기 시작하자 바로 구입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준 일이 생각납니다. 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초창기 빔프로젝터도 비싸게 구입했습니다. 30여 년 전인 그때는 비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나무를 심은 사람》은 장 지오노의 말년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프랑스에 사는 한 젊은이가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부피에는 혼자 황무지에 살면서 도토리나무를 심었습니다. 도토리 10만 개를 심었는데, 나무로 자란 것은 1만 그루였습니다. 그렇게 34년 동안 나무를 심었더니 황무지는 수십만 그루의 떡갈나무 숲으로 바뀌었고 개울이 흐르고 새가 모여드는 생명의 숲이 되었습니다. 1만여 명이 함께 사는 마을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노인이 된 부피에는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아소카 왕은 모든 국민들이 최소한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아야 한다고 선포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치유력이 있는 약나무와 열매를 맺는 유실수와 연료로 쓸 나무, 집을 짓는 데 쓸 나무, 꽃을 피우는 나무를 심을 것을 권장했다. 아소카 왕은 그것을 ‘다섯 그루의 작은 숲’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까지 몇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았는가.” 처음에는 힘들지만 벼르고 벼르다가 나무를 심고 보살피면 내 가슴이 먼저 따뜻해집니다.
부피에가 심고 가꾼 꽃과 과실은 한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1만여 명의 마을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면천읍성에 갈 때마다 마치 면천 곳곳에 부피에가 살고 있는 듯한 감동을 하였고, 그들이 그동안 심은 씨앗은 면천읍성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서 새롭게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7. 공동의 선(善)을 위한 한 사람의 꾸준한 실천은 어느새 ‘지구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기적을 일으키지만, 그 기적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희망의 나무를 심고, 우리의 영혼에 푸른 떡갈나무를 키워낼 내일의 도토리를 심는 일은 우리 능력이 비범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좋아하면서 묵묵히 그 길을 갈 수만 있다면 공동의 선을 위한 시간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듯이 공동체의 건강한 모습을 영글게 하는 부분이 됩니다.
뒤따르는 사람은 좋은 곳을 고맙게 걸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걸음에도 씨앗이 떨어집니다. 작고 오래되고 평범한 곳인데, 다음 사람이 걸어간 발자국 위에도 바람이 스치고, 대나무 잎이 살랑거리고, 샘물은 맑게 흐르고, 진달래꽃이 핍니다. 늘 새롭습니다. 걸어간 길이 좋은 곳이 됩니다.
(*면천읍성에서 이렇게 걷다가, 혹시 시간이 나신다면 자동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신리성지에 가보시기를 바랍니다. 잔잔하게 걷다가 하늘을 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