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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꽃이 핍니다농촌이야기 2023. 4. 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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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봄은 유독 산불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산불은 정말 무섭습니다. 지난 4월 2일 발생해서 사흘간 지속한 홍성군 서부면 산불은 제가 사는 마을 지척이어서 남의 일 같지 않았고, 더구나 마을 사람들 친인척도 그곳에 살아서 빨리 산불이 진화되기를 기다린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홍성 산불 피해 규모는 상당히 큰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보도된 피해 상황을 보면, 주택 59채, 축사 20동, 창고 24동, 비닐하우스 48동, 컨테이너 등 시설 21동, 농기계 35대, 수도시설 4개, 태양광 1개 등 모두 172곳의 시설이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축 피해는 소 3마리, 돼지 850마리, 산란계 8만 마리, 염소 300마리 등 8만 1,153마리가 폐사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을 통해 그곳에 있는 친척들 형편을 들어보면 이후로도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거리는 조금 떨어졌지만, 보령도 산불 피해가 제법 있었습니다. 피해 지역은 평소 마을 관련 사업에 도움을 주느라고 자주 들렸던 친근한 마을들입니다. 임야도 꽤 소실됐고, 농가주택은 여러 채가 피해를 보았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날씨가 예년과 달리 뒤숭숭해서(?) 아침저녁은 생각보다 춥습니다. 산불 피해를 본 마을 이장들은 마을 상황이 우선 급하다 보니 문자를 여러 곳에 보낸 모양입니다. 문자가 제게도 여러 개 왔습니다. “먹을 것은 그런되로 지원받는데 집이 홀라당 탓으니 추워서 입을 옻 의복. 앞으로 여름옻. 살림 도구 등이 절대 필요합니다. 관심가지시고 도움 주실 분들은 연락주세요.” 보내준 문자 내용 그대로입니다. 환절기에다가 이상기후 탓인지 올봄은 일교차가 무척 큽니다. 다행히 문자를 본 많은 이들이 재빨리 도움의 손길을 잇고 있습니다.
2. 꼭 한 달 전에 경북 울진에 다녀왔습니다. 2022년 울진 삼척 산불이 일어난 지 일 년이 되는 즈음입니다, 2022년 3월 4일부터 13일까지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 지역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이 산불은 산림 2만여 ha를 태우고 9일이 지나서야 진화가 됐는데, 산림청이 관련 통계를 집계한 1986년 이후 ‘가장 오래 지속된 산불’이라고 합니다. 피해 추정 면적은 2000년 동해안 산불(2만 3,794ha)에 이어 역대 두 번째를 기록했다고 하고요.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335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주택은 326동, 창고 171동, 축사 26동, 기타 85동 큰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실 홍성이나 울진이나 이렇게 수치로 표현하는 피해 통계가 제대로 된 피해 통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피해를 본 사람의 고통이 통계에 반영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고, 그나마 시간이 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재로 인한 피해는 크든 작든 삶의 자리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또 주민들 각자가 입은 트라우마는 어떤 지표로도 측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더구나 피해를 본 다수의 주민은 나이가 많은 분들입니다. 인생을 마무리하려고 한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본 마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이제는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한 사람의 상처를 존중하며,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다양하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잘 돌아가야 합니다. 산불은 무자비하게 마을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3, 경북 울진을 방문한 이유는 울진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해 기독교에서 마련한 프로젝트 중 한 부분의 컨설팅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산불 피해 지역에 정부 및 지자체의 지원과 국민들의 지원이 답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도 나름대로 마을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피해 지역 위로와 마을 살리기를 계획하고 그 일을 시작하는 준비를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3억 7천만 원 정도 예산으로 몇 개 교회를 선정해서 산불 피해 지역 마을의 회복을 위한 공동체 활동을 하도록 지원하는 일입니다. 프로젝트 이름이 ‘마을 살리기’입니다. 사실 추상적인 이름이기도 하고, 마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제목입니다.
울진은 개인적으로 군대 시절에 불영계곡 길을 뚫는 공사를 하느라고 일 년간 파견됐던 곳이어서 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불영계곡 길을 뚫는 공사를 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서 제가 속한 중대가 주둔한 그 근처에 위령비가 크게 세워져 있습니다. 같은 나이에 같은 시절 군 생활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동료들의 조형물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 아픔을 스치며 찾아간 울진의 산불 피해 지역 마을 살리기 컨설팅 자리에는 여러 목회자와 교회 관계자들이 모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을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고 있는지 질문도 했습니다. 마을에 대한 이해는 정해진 답이 없지만 일단은 마을과 함께 사는 모습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교회가 큰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을 사람들과 소통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가 마을을 살리려면 마을과 함께 살아갈 준비를 본격적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울타리를 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도 마을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에 부분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부분이 건강해야 전체가 건강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건강한 생태계의 일원이 돼야 합니다. 어떤 프로젝트를 위해 몇천만 원 지원받았다고 해서 마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금액이 적더라도 마을을 위로할 수 있는 일, 마을과 함께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일을 찾지 않으면 마을 살리기를 할 수 없습니다. 일반 사회도 그렇지만 요즘은 교회도 물질이 있어야 무엇인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운 시간 보낸 후 봄에 꽃이 피는 것은 돈이 있어서 피는 것이 아닙니다.
4. 보령에 처음 왔을 때,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농촌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농사의 원리에 대해서, 땅에 대해서, 축산을 하는 사람들과 만날 때는 가축을 키우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비록 농사짓지 않더라도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는 PC통신 시절이었기 때문에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을 통해서 농촌 정보를 수집하고 부단히 익혔습니다. 그리고 마을 곳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가정을 돌아보다가 예쁜 꽃을 피우는 화분들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혼자 보기 아깝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다들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봄날이 가기 전, 하루를 정해서 마을 집집의 화분을 모아놓고 사람들을 초대한 꽃 축제였습니다.
꽃 축제는 꽃과 즐거움을 누리는 정도로만 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오다 보니 다음 해도 하게 되고 그렇게 이어진 것이 십오 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동안 꽃 축제는 농촌 자연을 누리는 보령 지역 축제로 조금씩 커졌고, 자연과 어울려 마을 농산물 판매와 마을 여행 등으로 이어지고 마을이 가지고 있는 경관의 중요성과 마을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함께 찾는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틈틈이 여행했습니다. 다른 마을도 둘러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재미가 있을까 여러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도 어렵사리 살려내면서 지금까지 마을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고, 또 마을에 수목원도 만들고 농민들이 주축이 된 오케스트라도 만들었습니다. 농촌의 가치를 기꺼이 알리려는 사명감이 있는 이들에 의해 누구라도 농촌을 누릴 수 있는 농촌 체험관도 들어섰고요.
물론 이런 일이 마을에 필요하지만, 마을 일의 핵심은 아닙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활동을 통해 마을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지만, 그 자체만 중요하게 생각하면 쉽게 지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또 여간해서는 지속 가능한 일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농촌의 여러 마을이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아래 각종 마을 만들기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책적으로 시행하는 농촌 마을 만들기 사업을 보면 많은 돈을 투자해서 투자가치를 최대한 보존하려는 경제사업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잘 되는 마을도 있지만 상당수의 마을은 오히려 사업을 진행하다가 방향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습니다. 마을은 기업이 아니고 농업과 함께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라는 것을 간과합니다. 마을도 다양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왕 하는 마을 만들기 사업은 마을에 맞는 다양성을 정착시키는 쪽으로 가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5.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이 힘을 잃고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되고, 몸이 아프고 빈자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해서 순응하지만, 몸이 아파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보면 주위의 사람들도 그 아픔에 함께 힘들어합니다. 올해 87세가 되는 유태종 어른은 최근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항암치료를 택했지만, 한 번 항암치료를 하고서는 무척 힘들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면서 삶이 흐트러지지 않기를 애씁니다. 돌아보면 지난겨울부터 부쩍 몸이 아픈 분들이 늘어납니다. 마을 공동체로 함께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마을을 태우고 있는 것은 산불만이 아닙니다.
울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보령에 오니 오히려 마을에 관한 숙제를 울진에서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관여했던 보령의 남심리 마을이 이번 공모사업에 잘 선정돼서 5억을 지원받아 마을 사업을 하게 됐습니다. 서로 기뻐하고 마을회관에서 잔치도 열었습니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축하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마을 사업이 계획한 대로 잘 될까? 의구심도 듭니다. 남심리 마을도 오늘 대한민국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이 나이 많고 빈자리가 늘어나고 있는데, 5억 사업을 잘 진행했다고 해도(그것도 어렵지만) 그것이 마을 살리기에 어느 정도라도 이바지할 수 있을까. 사실 마을 공모사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산적한 문제를 껴안고 있습니다. 산불이 난 지역은 당장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살기가 무척 힘들지만,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 많은 농촌 마을은 직접적인 산불이 아니더라도 마치 산불이 난 듯한 상황에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먹먹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6. 저녁 늦게 집으로 오는 길에 마을에서 가까운 장례식장 곳곳이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봤습니다. 자세히 보니 주차장에 차들도 많습니다. 아마 장례를 치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 생각이 납니다. 그동안 장례식장 주인이 몇 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장례식장을 지을 때 주변 마을과 마찰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가까운 장례식장을 놔두고 멀리 있는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바람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 바람에 주인도 몇 번 바뀌게 되었고요.
한 번은 새롭게 장례식장을 인수한 젊은 주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마을과 관계를 좋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봤기에 이제는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나보다고 했는데, 투자한 만큼 사업이 잘되지 않고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냉대가 심하다면서 갑자기 눈물을 쏟았습니다. 장례식장은 마을을 위한 사업이라고 강조하면서요. 당황했습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저를 찾아온 것이지요. 실컷 눈물을 쏟는 그에게 나름 격려의 말을 건넸지만 참 난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 개선을 도울 수는 있지만, 사업이 잘되려면 돌아가신 분이 자주 나와야 하는데 이는 마을로 봐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하니까요.
어쨌든 불이 환하게 켜진 장례식장을 보니 사업이 잘돼서 좋겠다는 생각과 마을 사람들이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겹칩니다. 말라붙은 저수지처럼 바닥까지 드러나기 시작하는 마을이라지만 그래도 장례식장만큼 마을도 곳곳이 조금씩 환하게 밝아지면 좋겠습니다.
7. 꽃샘추위 속에서도 도무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꽃들이 피어납니다. 흙은 여전히 차가운데요. 십오 년도 훨씬 전에 동강할미꽃 모종을 어느 수목원 지나는 길에 사 와서 들꽃마당에 심었습니다. 얼마 가지 못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이렇게 지나도록 동강할미꽃은 봄 내음 나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십오 년 전 그 모종은 이젠 온데간데없어졌지만, 바람 따라 이리저리 번진 후손(?)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올봄에도 여섯 군데서 피어났습니다. 꽃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황량한 땅에서 꽃은 희망이 됩니다. 꽃 역시 고개를 내밀다가 차가운 날씨에 얼고 비바람에 휘청거리지만, 잠시 주저앉았다가도 밝게 일어섭니다. 그 모습이 기쁩니다. 고마운 마음이 들고 마음에도 희망이 덩달아 자랍니다. 봄이 가기 전에 손이 가는 곳부터 꽃 한 송이 더 심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조건에 의해서 생기지 않고 그 자리에 원래 있는 것을 봅니다. 없어진 것 같아도 어느 틈에 피어있습니다. 마을에 대한 걱정이 많지만, 때로는 웃을 수 있고 함께 사는 것이 그래도 힘이 되는구나 여겨져서 어쨌든 마을 사업도 진행하고 마을 살리기 컨설팅도 받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에서 많이 배우고 자연 앞에 겸손해집니다. 원래 마을은 자연에 순응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울진에서 마을 살리기 컨설팅에 참여한 여러 교회에서 공모 서류를 검토해달라고 부탁이 왔습니다. 보내온 서류를 살펴보니 울진에서 주고받은 내용들이 잘 반영돼 있습니다. 마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담았고, 교회의 내적 울타리를 벗어나서 마을의 일부분으로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도 들어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조금 더 마을에 다가가기를 바라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조언했습니다. 마을 살리기란 말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말고 함께 살아가는 것부터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산불 피해를 딛고 위로를 나누며 함께 사는 마을의 모습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 힘을 다른 마을에도 나눠주기를 바랍니다.
마을의 현실은 먹먹하지만 그래도 어떤 길이 우리가 가야 할지는 묵묵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꽃에서 배웁니다. 봄에는 꽃이 핍니다. 마을에는 사람이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