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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에게’이런저런글 2022. 10. 10. 09:58
1. 먼저 천상병 시인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천상병 시인의 시를 20대 중반에 접했고, 그의 삶을 알았다. 1987년을 기점으로 20대 후반 내 갈 길의 전환점을 맞으며 마지막 작곡한 노래, 그리고 지금도 가끔 부르는 노래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다. 그때, 참으로 이 시가 좋았다. 천상병 시인이 1970년에 발표한 시이다.
천상병 시인은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면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삶이 망가졌다. 결혼은 했다. 1993년에 세상을 떠났다. 동백림사건은 40여 년이 지난 뒤에야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로부터 당시 고통을 당한 이들에게 정부는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권고가 나왔다.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을 적발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는데, 그러나 정작 간첩과 간첩 미수죄로 기소된 23명 중 최종심(대법원)에서 간첩죄를 적용받은 피고인은 한 명도 없었다. 예술인에 대한 국가권력의 남용은 주로 그들이 남기는 작품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작품에 내재한 사상이 불온하다거나 음란하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천상병 시인이나 이응노 화백 등은 작품과는 무관하게 국가권력에 의한 고통을 받았다. 회복할 수 없는 비극만 남았다.
2. 이응노 화백은 홍성 중계리 출신이다. 홍성에 인접한 보령에 살면서 이응노 이름을 들었고, 수덕여관에 밥 먹으러 가면서 대문 앞 암각화를 보며 그의 작품을 접했다. 끊임없이 변해갔던 그의 작품세계는 예술의 안내자가 되었다. 파리에 거주하던 이응노 화백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었다. 1967년 어느 날, 세계를 무대로 국위 선양한 그를 치하하고자 한다는 대통령 초청에 선뜻 응했으나 발을 디딘 고국에서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1969년 석방되고, 다시는 이 땅을 밟지 못해 1983년 프랑스로 귀화했다. 1989년 1월, 마침내 고국에서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설렘이 컸지만, 파리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만다. 그의 나이 여든여섯.
“나는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 흰옷을 입는 기상 등 깨끗하고 고상하고 착한 우리 민족성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그가 한 매체와 인터뷰 중 남긴 말이다.
나는 왜 고암 이응노 화백에 대한 글을 쓰면서 천상병 시인 이야기를 할까? 두 분 다 무척 좋아하는 분이고, 무엇보다 동백림사건으로 인생이 흔들린 두 분 삶의 궤적이 마음에 깊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특별하다. 천상병 시인의 시를 읽으면 이응노 화백 생각이 나고, 이응노 화백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천상병 시인 생각이 난다.
오래전에 헌법재판소 앞 큰길 건너 골목식당 메뉴판이 천상병 시로 채워진 것을 봤다. 식당 여주인으로부터 인사동 시절부터 가까이 지냈다는 천상병 시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도 동백림사건에 같이 연루된 이응노 화백 생각이 났다. 두 분은 말이라도 한 번 나눠봤을까? 천상병 시인의 고통을 통해 이응노 화백이 당한 고통의 무게를 느낀다. 수덕여관 암각화에는 그 무게가 새겨져 있다.
3. 이응노 화백을 처음 알게 된 수덕여관은 나에게는 밥집이었다. 오래전에는 수학여행을 오거나, 사월 초파일에 불공드리러 먼 길 온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던 여관이었을 터이다. 밥만 먹고 와도 수덕여관이 좋았다. 손님이 오면 수덕여관에 함께 갔다. 문자 추상 암각화도 보여주고, ‘힘든데 뭣 하러 그런 걸 하냐?’고 말리는 부인에게 삼라만상을 담았노라 웃었다는 이응노 화백 따라 함께 웃었다. 정작 수덕사 경내는 가끔 갔다. 가끔은 700년도 훨씬 넘었다는 대웅전, 그 뒤꼍 배흘림기둥에 귀를 기울이며 오래전 신심(信心) 하나로 깊은 산 속에 들어와 기둥을 다듬고 또 다듬었을 그 이야기를 헤아려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홍성 중계리 생가 터에 있는 '이응노의 집'은 2011년 11월 개관했다. (대전에는 2007년에 개관한 ‘이응노 미술관’이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주 드나든다. 어느 때 가도 참 좋은 곳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전시관과 커피 한 잔 누릴 수 있는 작은 카페. 찬찬히 걷기 좋은 잔디밭 하며 대나무 오솔길. 그리고 잠시 앉아서 쉬는, 생가를 복원한 초가집 마루. 사진 찍으며 걷는 길은 흙도 부드럽다.
4. 맨 처음 갈 때는 낙동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아이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고 싶었다. ‘이응노의 집’에서 열린 전시를 보고, 전시를 연 작가를 낙동학교로 초청해서 아이들과 미술 관련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아이들이 군대에 가고, 대학교를 졸업한다. 지금은 아내와 같이 가거나, 혼자 간다.
십여 년 넘게 ‘이응노의 집’에서 하는 행동은 늘 똑같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개울을 건너면서 전체를 한 번 조망하고, 전시관에 들어가서 걷던 길 그대로 작품을 관람하고, 나와서는 이리저리 걷다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카페는 정말 작다. 마음에 꽉 찬다. 처음에는 비어있어서 혼자 일회용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커피 마시면서 월간미술 여러 권을 뒤적거리는 것은 여전하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곳이 있어서 고마운 마음도 그렇다.
지금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 일정이 11월 13일까지이니 이 글을 볼 때쯤에도 전시는 끝나지 않았을 것 같다.) 전시회 제목은 ‘고암 이응노에게 경의를’이다. 홍성에 거주하는 예술가들이 각자의 작품을 통해서 고암의 예술을 기리는 중이다. 일본 방송국에서 만든 이응노 화백 다큐멘터리 영상도 나오고, 동백림사건으로 고통받는 장면을 연극으로 표현한 영상도 다른 화면을 통해 볼 수 있다.
전시회에 갔다가 한 시간 정도 집중해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봤다. 나도 제목을 붙였다. ‘고암 이응노에게’. 이미 여러 사람이 경의를 표하고 있으니 나는 다만 이응노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여전히 이방인이었던 그의 숨결을.
5. 이응노 화백은 사실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름을 날린 백남준보다 먼저 작품을 인정받은 세계적 예술가이다. 그가 구현한 예술 세계는 쉼 없이 변화했다. 우리 전통 화풍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서양 미술의 흐름을 유려하게 받아들였다. 우리나라의 재료인 먹과 붓을 통해 이미지화한 모습은 기존의 한국화와는 다르면서도 우리 민족의 공동체 정신을 보여준다. 특히 작품에 시대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담아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아픔을 털고 다시 일어나 삶의 터전을 재건하려는 사람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고단한 하루를 술 한 잔에 달래려던 사람들의 현실을 마음에 담아두고 그림으로 그렸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후 완성한 문자추상 양식에도 기호화된 형태로 등장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잘 나타냈다. 이응노 화백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집약적으로 담겨있어서 그의 예술의 대미(大尾)라 할 ‘군상’은 그가 평생에 걸쳐 함께 하고자 했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어서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마음 그 자체였다.
6.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아침.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한 학생들 앞을 총과 칼을 든 비상 계엄군이 가로막았고, 이후 무자비한 살상이 벌어졌다. 나는 그때 학교에서 공연할 연극 준비 때문에 시내버스를 타고 금남로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솟아오르는 연기와 되돌아가라는 외침을 듣고 서둘러 광천동 하숙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연극은 무대에 올릴 수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은 파리에서 작업 중이던 당시 77세인 이응노 화백의 귀에도 들어갔다. 비통한 심정을 머금고 이응노 화백은 먹을 풀고 붓을 들어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광장에 가득 찬 사람들. 무수한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서 아주 격동적인 춤을 추는 모습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반복적으로 있지만 어떤 틀 안에 갇혀 있기 보다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인다. ‘군상’을 보고 있으면 그날, 21살 나도 저 한자리에 있던 것 같다.
“광주사태를 계기로 해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 그때부터 나 자신만을 위하는 대신 저들 민중의 한가운데 뛰어들어 남은 생을 마감할 작정입니다. 매일매일 군중의 외침을 화면에 옮기고 있습니다.”(고암미술연구소 편저,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얼과알, 2000)
그는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인류의 어울림과 평화를 노래하는 ‘군상’ 연작을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끝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
“내 그림은 모두 제목을 평화라고 붙이고 싶어요. 저 봐요. 모두 서로 손잡고 같은 율동으로 공생 공존을 말하는 민중 그림 아닙니까?”(일요뉴스. 1988년 10월 23일 인터뷰에서)
7. ‘고암 이응노에게 경의를’ 전시회에 출품한 작가들의 작품을 찬찬히 봤다. 이번 전시는 형식이나 내용 등에 구애받지 않고 예술에 대한 구별과 차별을 두지 않는, 이응노 화백이 주창한 정신이 나름대로 잘 새겨있다. 나는 출품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이응노의 숨결을 느끼며 사진 찍는 일이다.
먼저 '이응노의 집'에서 예술가들의 전시 사이를 돌아다니며 이응노 화백의 흔적을 상상하는 일부터 했다. 대나무 숲길을 찍었다. 대나무는 이응노 화백의 작품 세계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뿐더러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그에게 언제나 조국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전시 공간 영상물에서 이응노 화백 잔상을 찍었다. 두 장을 연달아 찍었다. 비슷한 구도에서 할머니가 보고 있던 영상물과 할머니가 떠난 빈자리에 나타난 이응노 화백의 얼굴을 찍었다.
파리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마침 내가 있던 전시장 옆방이 건너 유리창에 반영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을 기다렸다가 어디론가 떠나가는 듯한 뒷모습을 찍었다.
전시관 밖에 나왔는데, 외모의 특징이 이응노 화백을 조금 닮은 듯한(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바위에 걸터앉아 몸을 구부리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핸드폰만 없다면, 옛날에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를 때 아마도 저렇게 마당 바위에 앉아 고뇌를 감싸는 절절함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이 이어진다. 학예사 사무실 곁으로 가서 유리창에 비친 그의 반영을 찍었다. 이응노 화백이라고 생각하니 미묘한 감정이 올라온다. 그는 여전히 구부린 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전시 작품을 설명하는 모녀도 찍었다. 그리고 이응노 화백이 남겨준 자리를 찾았다. 그가 남긴 예술의 자리. 아니, 예술과 상관없더라도 그가 보여준 사람의 자리를 스스럼없이 찾아와 마음껏 쉬고 삶의 충전을 얻는 자리. 마침 여러 가족이 자리를 펴고 ‘이응노의 집’ 잔디 마당에서 쉬고 있었다.8. 두어 달 전에 천안에서 열린 어떤 모임에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노래했다. 그리고 잠깐 천상병 시인 이야기를 했다. 그가 겪은 고통을 나눈 이들도 덧붙였다. 마침 그 자리가 갤러리였다. 처음 대하는 화가였지만 동물 그림을 통해 이웃과 관계를 생각하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풍성하게 묻어났다. 사회 현실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발언하고, 오늘 우리 모습을 고민하며 희망을 모색하는 모습이 위로가 되었다.
이응노 화백은 고통을 통해서 자기 세계를 키우며 사람을 생각했다. 천상병 시인은 고통으로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귀천’을 통해 그 자신이 시가 되었다. 힘든 삶은 이 땅에서 소풍으로 삼았다. 아름답지 않았지만 기꺼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아름다운 마음이 이응노 화백의 ‘군상’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사람이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서로 손잡고 함께 살아가는 마음. 고통을 서로 헤아려주면서 ‘군상’ 안에서는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돌아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이응노의 집’이 이응노 화백의 예술과 삶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주기를 바란다. 예술가니까 그의 예술이 보여야겠지만, 누구나 그렇게 말하듯이 삶에 기반을 두지 않는 예술가는 당연히 없다. 그의 삶을 통해 그의 예술의 진정한 가치가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더불어 희망을 모색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세상에서 서로 챙겨주며 소풍을 누리는 모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름답게 살다가 돌아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