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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셨는지요? 저는 한 때 이 영화의 마니아였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이 영화의 한 장면 장면들이 떠오르는데, 그중에서도 시청 건축과에 근무하는 수철이가 죽음을 염두에 둔 채, 여전히 삼류밴드 생활로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오랜 친구인 성우에게 '너는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 장면은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가끔씩 나에게도 다가오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의 모습을 그리고, 또 그 꿈을 키워가고 있지만,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지 늘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일단은 행복의 조건들을 많이 갖는 일에 우선 집착합니다.
돌아보면 분명히 행복의 조건들이 많아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들이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더라도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하기에는 머뭇거려집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조건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름대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과연 행복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아마도 여러분들 속에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요.
여기서 잠시,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라는 책을 펼쳐 보고 싶습니다.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책인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오래 전에 이현주 목사님을 뵐 때 틈틈이 접했던 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농촌 목회의 길잡이 가운데 하나이구요.
ⅱ.
이 책에서 스웨덴 여성언어학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인도 서북부 히말라야 산록의 라다크에서 16년간의 현지체험을 바탕으로 라다크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타고난 당연한 권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회적·생태적 위기로 말미암아 그 본질이 변하고 있다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갑니다.
인도 카슈미르 동부지역에 있으면서 대부분 티베트계인 라다크는 여름에는 햇볕에 탈 듯이 뜨겁고, 겨울에는 온도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그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혹심한 기후를 가진 곳이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검소한 생활과 협동,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생태적 지혜를 통하여 천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왔습니다. 라다크 사람들 대다수는 농부들로서 혹심한 기후와 자원의 빈약함에도 시간을 넉넉히 가지며 부드러운 속도로 일을 하고 긴 겨울만큼이나 놀라울 정도로 많은 여가를 누렸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고, 긴밀한 가족적 공동체적 삶속에서 건강한 사회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라다크에도 서구식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환경파손과 사회적 분열이 생겨났고,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등장하고,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선망이 일어났습니다. 행복에 관한 생각들도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라다크의 사회는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라다크에서 서구의 교육은 라다크 사람들에게 행복의 조건들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서구의 교육은 오히려 그들의 문화가 얼마나 열등한지를 강조했고, 세계화의 열풍 속에서 그야말로 제3세계인으로 전락한 라다크인들은 이제 누구나 가난하고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가보다도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로 서로를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개발의 후유증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그동안 만족을 누렸던 삶에 대한 충만감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물질적으로 혜택은 많아졌지만 그 대신 수 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문화와 전통을 초라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고민은, 이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지만 라다크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누려온 사회적, 생태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고도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개발의 방식이 일반적인 개발방식처럼 오래된 기초를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초 위에다 건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발과 배움이 오직 한가지 방향으로만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라다크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개발의 허상을 알리고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고 지켜가도록 설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 노력들의 결과로 젊은이들이 마을에 남게 되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난방설치를 집집마다 하게 됩니다. 라다크는 전 세계의 환경주의자들에게 친환경적이고 친공동체적인 생활의 전형으로서 소개되고 개발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해 가는 공동체사회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가 라다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알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은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의 근원적인 병폐를 통렬하게 드러내지만, 그와 동시에 오늘날 사회적, 생태적 재앙에 직면한 우리 모두의 장래에 대하여 구체적인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ⅲ.
경제적으로 너무도 어렵고 일자리 얻기도 힘들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미래는커녕 하루하루가 급박하고 사람들은 바쁘게만 움직입니다. 절망 앞에서 너무도 쉽게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늘어갑니다. 자신을 돌아 볼 시간이 없고, 여유는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늘 초조해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불안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요? 우리의 일상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달플까요?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이러한 질문에 '오래된 미래'는 라다크의 개발 이전과 개발 이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더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우리가 타고난 당연한 행복을 찾아내고 누리는 만큼 미래는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에게 아직 구원의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의 진정한 원천은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 때, 미래는 오래 전에 숨었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서구 문물이 유입된 라다크가 예전의 상태로 온전하게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들은 이미 라다크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라다크에서도 오래된 미래는 희미하게 변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라다크 이야기는 지금도 올바른 미래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안내합니다. 따뜻한 햇볕을 주고, 공동체 속에서 깊은 생태적 지혜로 느긋하게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행복하냐?'는 물음을 떠 올리며 조용히 '오래된 라다크에서의 하루'를 꿈꾸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