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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한 가족사진 촬영 요청을 받았습니다. 수목원 풍경을 배경으로 가족들의 이런저런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요즘은 자녀들이 전국 각지에, 혹은 외국에 흩어져 있어서 함께 모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절입니다. 저도 어머님과 형제들이 함께 모인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코로나 19 영향이 컸지만, 저마다 일이 있고 시간도 어긋나서 모이는 것이 갈수록 더뎌집니다. 아무튼, 찍은 사진을 건네주기 위해서 사진을 선별하는데 사진마다 밝은 가족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가족사진에 담긴 이야기는 가족공동체에 의미가 크지만, 밝고 정겨운 모습은 건강한 사회 공동체를 이루는 소중한 일부가 됩니다.
농촌에 살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도 20여 년이 넘었습니다. 본래 손재주가 없어서 필름 카메라는 만지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 주변 사진관에 간 적은 제법 있지만, 직접 다루면서 현상하고 인화한다는 것은 엄두도 안 났습니다. 다행히 90년대 후반 디지털카메라 가격이 저렴(?)해지고 컴퓨터에 손이 가면서 디지털카메라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는 암실 인화가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 디지털 인화를 하므로 책상에 앉아서 사진을 만지는 일은 즐거움도 주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30만 화소 디지털카메라 사진임에도 모니터 화면에 꽉 찬 아이 사진은 감동이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 사진의 출발은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기록하는 부모의 마음이었습니다.
2. 프랑스 다게르의 은판 사진이 나온 1839년 이후, 사진은 인간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기록과 예술 사이에서 사진은 특별한 구분 없이 지금도 제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제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핸드폰으로 인해 사진은 삶 속에 더욱더 깊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사진을 찍기 시작한 처음부터 기록용으로 사진을 사용하는 편입니다. 가끔 예술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제 능력과는 별개의 일인 것 같고 기록으로 담은 사진은 이야기를 만드는 힘이 있어서 사진의 용도를 그렇게 정했습니다.
돌아보면, 아이 키우는 사진부터 시작해서 마을 사람과 풍경, 풀꽃 사진으로 한 걸음 나갔습니다. 거의 30여 년 전이지만, 처음 농촌에 와서 마을 구석구석을 살펴보다가 문득 내가 아는 풀꽃 이름이 없다는 각성이 왔습니다. 보통 잡초라고도 불리는 작은 풀꽃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자세히 보아야 예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오래 보면 사랑스럽고요. 드디어 예쁜 모습은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름을 모르니 안타까웠습니다. 또 다른 시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말을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 것은 작은 꽃을 사진 찍고 그의 이름을 배우면서였습니다. 이름의 힘은 놀랍습니다. 사진은 제게 그 이름의 힘을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3. 사진을 찍는 일의 미덕 중 하나는 자신의 주변을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소외된 이웃을 살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좋은 사진의 조건이 됩니다. 잡초는 소외된 이웃이었고, 찬찬히 살펴보니 예쁜 풀꽃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름 모르는 풀을 만나면 사진에 담아서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이 나름대로 해박한 분들이었는지 꽃 이름과 습성을 놀라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자연과 마을 살이 관계를 일깨우는 스승들을 만났고, 마음에는 풍성함이 쌓여갔습니다. 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한 사진 공부는 그렇게 풀꽃을 바라보며 시작되었고, 관계를 통해 함께 사는 의미를 깨달았고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는 끌림이 되었습니다.
차츰 곳곳에 피는 꽃을 사진에 담고 프린트해서 나눠주다 보니 그동안 계절별로 모은 꽃 사진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보고 싶었습니다. 저마다 가정에서 화분을 가져와 마을 꽃 축제를 하면서 발걸음이 닿을 사이사이에 지금은 보이지 않는 꽃 사진을 넣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고 십 년도 훌쩍 넘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축제는 코로나 19로 인해 잠시 멈췄고 지난 시간보다 더 빨리 마을은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지난 사진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모습들이 많이 나옵니다. 길이 넓어지면서 나무들이 없어졌고, 길 건넛집은 밭이 되었고, 반갑게 인사하며 손을 잡던 모습들은 그리운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래도 사진을 통해 그 모습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불쑥 마음에 들어오면 애틋함은 뭉클거리며 치솟습니다. 마치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punctum)이라고 할까요.
4.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했던 푼크툼이라는 용어는, 사진을 보며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보는 이의 경험에 비추어 사진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대로만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이해방식이 아닌 개인의 취향이나 경험, 무의식 등과 연결해서 사진의 의미를 스스로 규정하고 결정할 때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강렬한 자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는 경험을 하고 그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어머니의 옛 사진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맞닥뜨렸을 때 그 사진의 인상은 그를 찔렀습니다. 이런 경험은 그의 기존의 기호학에 대한 신념에 큰 타격을 주었고 푼크툼이란 개념을 정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진은 이미 그 자체가 숙명적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사진의 숙명과는 상관없이 시간에 흔들리고 미묘한 감정에 흔들립니다. 때로는 그리움과 더불어 아픔으로 다가오고, 내 마음의 생채기에 위로가 되어 덮이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함께 웃던 시간이 지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새로운 시간으로 다가오고, 그러다가 눈가에 눈물지으며 안녕을 고하게 합니다. 사진의 힘은 숙명 앞에 순응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것을 지금 내 시간 속으로 끌어당겨 새로움을 불러일으킵니다.
5. 그렇게 조금씩 더 사진 공부를 한 것은 낙동초등학교 아이들 모습이었습니다. 본래 농촌학교인 낙동초등학교도 쇠락해지는 농촌 환경을 이기지 못해 아이들 감소로 폐교 위기에 처했습니다. 당연히 언제나 있을 줄 알았던 학교가 흔들린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과 뜻을 모았습니다. 학교가 없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있는 한 우리 마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학교 살리기에 각자 역할을 나누면서 저 또한 제가 할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승합 차량으로 먼 곳에 사는 아이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학교에 올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벌써 15년도 넘는 시간이 되었고, 학교는 여전히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활기찬 모습이 넘쳐납니다.
처음에는 제가 학교를 돕고 아이들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다 보니 그동안 힘을 얻었던 것은 오히려 나였습니다. 아이들의 밝은 얼굴과 학부모들의 다정한 시선, 그리고 힘든 일은 먼저 하려고 나섰던 동창회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학교를 중심으로 건강한 마을 공동체를 세워나가기 위해 노력한 모습은 단지 학교에 국한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학교도 마을의 일부분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함께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마음이 새겨져 있습니다. 학교를 지탱하기 위해 애썼던 노력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돌아보니 지나온 날은 서로 응원한 시간이었고 마을이라는 공동체가 건강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맞댄 시간이었습니다. 사진은 기록을 통해 지나갔다고 생각한 그 시간을 끄집어내고 다시 가야 할 길을 이야기합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찰랑거리는 바다를 뒤로하고 학교 가는 차를 타기 위해 오늘도 뛰어옵니다.
6.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에 촬영된 대상은 과거에 반드시 카메라 앞에 있었다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을 테제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동시에 ‘그 대상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즉 죽음을 암시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대상도 촬영된 순간, 바로 그 순간은 지나가버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그냥 그렇게 지나가버리는 것일까요?
바르트는 말합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사진에 재현된 모습에 사랑하는 감정을 지닌다면 사진의 모습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도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에서 느끼는 감정이 극대화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특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사적인 사진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바르트는 ‘이상적인 사진은 사적인 사진 즉 누군가와 사랑의 관계를 가진 사진이다. 사진에 재현된 인물과 비록 가상적일지라도 사랑의 관계가 있다면 그 사진은 모든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진은 기록합니다. 기록된 사진은 그 순간에 사진의 모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진에 재현된 모습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사진의 힘은 기록을 넘어섭니다.
7. 사진 속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진 속 아이들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사진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머물러 있지 않고 내 시간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사진에 재현된 아이들 모습도 그렇습니다. 사진은 관계를 알게 합니다. 설령 지나치듯이 사진을 찍었어도 사진 속에 내 관심이 새겨있고 나와 연결이 나타납니다. 사랑이 담긴 사진은 힘이 있습니다. 가족사진이 그렇고, 공동체 사진이 그렇고, 작은 풀꽃 사진도 그렇습니다.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를 통해 누군가 건네준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그 사이에 선 내 모습 사진 한 장은 마음을 요동치게 하고 동공은 커지게 만듭니다.
사진 공부는 기록에 대한 공부였고, 관계를 바라보는 공부였습니다. 마을 곳곳은 그 자체가 제 눈에는 사진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변하고 때로는 존재하지 않고 바라보는 이가 없어도, 오래전에 모습, 그보다 더 오래전에 모습이 그대로 있습니다. 여전히 함께 걷고, 이제는 수확해야 할 밭작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매발톱꽃이 신기해서 맴돌던 그 자리는 늘 맨 처음 파란 매발톱꽃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내 마음이 움직여서 내가 본 것을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가족을 보며, 풀꽃을 보며, 마을 공동체를 보며 내 마음을 기록한 것이 제가 한 사진 공부였습니다.
8. 사진은 영화나 소설과는 달리 한 프레임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을 들려줍니다.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프레임이 갖는 함축이라는 특성은 때로는 더 강렬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진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무언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 무언가는 나와 연결이 되고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과 이어집니다. 우리 마음이 닿는 무언가에서 사진의 힘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다가가서 관심을 두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관심을 일으키는 일,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모든 활동에 제약이 생긴 것도 그렇지만, 특히 이웃의 삶의 형편은 국가의 경제적 위상에 맞지 않게 소득 양극화로 인한 내몰림 앞에 위축되고 있습니다. 사회 발전은 경제 성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시기입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함께 만드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 사진작가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눈여겨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충분히 좋은 사진을 담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라는 프레임 안에 우리가 사는 모습이 잘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지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때든지 자극을 줄 수 있고, 우리를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9. 요즘 평범한 사진들이지만, 기록으로 남은 사진을 정리해서 농촌의 모습을 드러내며 마을의 즐거움을 여행으로 삼는 일에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 장 두 장 찍은 마을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소개하다 보니 알음알음 찾아오는 이들도 있고, 일부러 마을을 여행하기 위해 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 마을 여행의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찍은 사진이 삶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진 공부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찍고 보는 이의 마음으로 다시 보게 하는 일입니다. 그 속에 다가가서 관심을 두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