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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해를 맞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2021년에는 ‘어떻게 하면 잘 팔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제가 팔고 싶은 것을 가지고 소비자에게 어떻게 접근하고, 소비자의 마음을 어떻게 열고, 소비자가 사고 싶어서 어떻게 가까이 오도록 만들까… 구체적으로 이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전엔 눈여겨보지 않던 마케팅 서적도 가끔 뒤적거립니다.
뭘 팔고 싶냐 고요? 팔고 싶은 것은 ‘마을’(여기서 마을과 농촌은 한뜻입니다)입니다. 추상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마을 곳곳을 팔고 싶습니다. 사실 마을 파는 사업을 하려고 지난 3년간 애를 썼습니다. 제가 직접 뛰어다닌 것은 아니지만, 중앙정부 사업을 받은 지자체로부터 마을 곳곳을 파는 사업을 위탁받아 법인 이사장으로 책임을 지고 사업단 운영을 했습니다. 인근 지역과 연계해서 6차 산업을 기반으로 한 마을의 주요 관광자원(여행, 체험, 먹을거리, 농수산물 등)을 소비자에게 연결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마을 주민 소득 창출과 마을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 이를 이용한 소비자에게는 만족스러운 마을 여행과 농수산물 구매가 되게끔 하자는 것이 취지였습니다.
6차 산업이란 1차 산업인 생산, 2차 산업인 제조·가공, 3차 산업인 유통과 서비스를 복합해서 일컫는 말로, 농가가 정성 들여 생산한 농산물 가공 유통 및 향토 자원 체험 판매 등으로 높은 부가가치를 발생시키는 산업입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농촌 마을을 팔아보는 것인데, 3년간 노력한 일은 농촌을 즐겁게 여행하고 농촌에 머물면서 편안함을 얻고 농촌도 원하는 이익을 얻도록 돕는 것입니다.
2. 그동안 십여 년 훨씬 넘게 농촌에서 축제를 팔았습니다. 농촌의 가치를 깨닫고 보니 농촌에서 축제한다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요즘 어느 축제장이든지 주머니에 단돈 천 원이라도 없으면 커피 한 잔 마시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축제라는 것이 뭔가요? 축제는 원래 마을이나 공동체(가족을 포함해서)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이나 시간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혹은 앞으로) 슬픔과 어려움을 이기는 동력으로 작용했고, 기쁨을 더 크게 승화시키는 놀이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축제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경계를 풀고 아낌없이 나누고 한마음으로 서로 챙겨주는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일부러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해서 그들의 몫을 잊지 않고 한쪽에 준비해두기도 했습니다.
축제를 팔면서 돈은 받지 않았습니다. 돈 이야기를 하니 이상합니다만 특히 먹고 마시는 것은 더더구나 돈과 멀리했습니다. 돈이 사람 구별의 기준이 아니었으니까요. 구별의 기준은 오직 축제를 통해 농촌의 즐거움을 체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뿐이었습니다.
축제가 열리면 차분하게 숲길을 걸어보고, 계절 따라 다가오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면서 정성껏 로스팅한 커피도 그 자리에서 마시고, 바로 옆 젖소 목장에서 가져온 우유로 직접 치즈도 만들어보고, 한쪽에서는 봄에 캐서 말려둔 쑥으로 만든 떡도 몇 점 집어 듭니다. 그래도 배고프면 맘껏 담아주는 국수 그릇 탁자에 올리고 전날 밤늦도록 담근 김치 한 조각 얹어 기분 좋게 먹는 일은 돈과 상관없습니다. 축제는 그렇게 먹는 데서 빛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생기가 돕니다. 잔디밭에서 이런저런 공연도 보고 여러 마을에서 벌려놓은 이야기판에도 들어가 봅니다. 그렇게 축제 속에 머물다가 가야 할 시간이 되면 ‘좋은 날 잘 보냈구나.’하고 집으로 가면 각자 축제가 끝납니다. 이런 축제를 오랫동안 했습니다.
3. 축제를 팔았다고 했는데, 사실은 마을 파는 일을 함께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마을로 불러오고 싶었습니다. 혼자서만 농촌의 즐거움을 누리기엔 마음이 벅차서 터질 것 같았고, 또 이렇게 좋은 농산물이 농민들의 땀방울과 상관없이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것도 마음 아팠습니다.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농촌에서 자라는 건강한 먹을거리와 처음부터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자연의 모습을 눈으로, 몸으로 만지고 보듬어 안고 삶의 활력으로 가득 담아 가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절임배추는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마을 주민인 농민들에게는 생업이고 경제 활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배추가 가을 농사 주 종목인데, 여간해서 배춧값을 제대로 받기 힘든 현실을 계속 지켜봤습니다. 배추 가격이 높아도 밭에서는 체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격 폭락은 금방 몸으로 느낍니다. 배추밭을 갈아엎어야 하니까요.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배추 가격 폭락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마을 사람들과 절임배추작목반을 만들어서 5년 이상 절임배추를 팔았습니다.
주로 인터넷 오픈마켓을 통해 팔았고, 축제 등을 통해 연결된 분들에게는 직거래로 팔았습니다. 정말 많이 팔았습니다. 다들 몸에 병이 날 정도로요. 그만큼 주문이 많았습니다. 농촌에 살면서 배추에 질린 적이 두 번 있었는데, 28년 전쯤 서울 응암동에 10톤 넘게 배추를 가져다주면서 끝이 없는(?) 배추 하역작업에 질렸고, 절임배추 작업을 하면서 절임배추를 배송 박스에 끝없이 담으면서 질렸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지옥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끝없이 절임배추를 끄집어내고 담고 나르고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주문 약속은 지켜야 하는데 제가 노동에 익숙하지 못해서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파는 경험도 했습니다.
4. 농촌 마을을 판다는 생각은 아시다시피 오래전에 유럽에서 나왔습니다. 유럽은 대체로 그동안 잘 정착된 것으로 보입니다. 통계를 보면 유럽에서, 특히 프랑스는 농촌 관광이 전체 농업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또한 프랑스 전체 관광 매출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농촌 관광이 지속가능한 농업 시스템을 유지해 주고 있으니까요.
유럽도 산업혁명 후 도시화가 이뤄지면서 농촌의 모습이 변화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우리나라처럼 이른 시일 안에 급속한 농촌 붕괴를 겪진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농촌은 그동안 도시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좁디좁은 땅에서 생존을 위한 쉴 틈 없는 농사로 말미암아 지금 어지간한 나이대의 사람들에게 농촌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어릴 때 부대끼며 살았던 농촌은 진저리나도록 고생한 곳이었고 떠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유럽과 달리 우리 농촌 마을은 여행지로 쉽게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농업 인구는 지속해서 감소하여 현재 224만 5천 명 정도 되고, 향후 10년 동안에 연평균 약 1.7% 정도 감소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는 젊은이가 거의 없습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그동안 자식들에게 ‘농사는 짓지 말라’, ‘도시 가서 살아라.’ 하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그만큼 농촌에서 삶이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농촌에서 사는 일이 주눅 드는 일이었으니까요. 주눅 들면서까지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5. 그동안 농촌의 가치는 주로 농사에만 머물렀습니다. 농촌이 가진 다양한 가치를 찾아낼 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유럽 농촌 관광 이야기를 했지만, 제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유럽에서 농촌의 삶은 다양한 가치로 인해 오히려 자부심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마을에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변했다고, 농촌 마을을 여행하는 자체가 자부심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농촌도 꿈을 갖고 정착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삶의 열정이 있고 문화도 향유하고, 일한 만큼 이익을 얻기 위해 큰 노력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농업으로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도시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것만큼이나 가족 농장 자체를 브랜드로 만들어서 농촌 문화를 선도합니다. 자부심이 커지면서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낭만이 살아난다고 할까요. 요즘 낭만적인 캠핑이 곳곳에서 유행이지만 마을에서 삶은 그 이상 낭만을 키울 수 있습니다. 낭만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마을을 팔 수 있다는 마음도 현실이 됩니다. 원초적인 삶의 낭만이 농촌 마을에 있습니다.
마을을 판다는 것은 마을의 감성과 낭만을 판다는 것이고, 마을의 건강함을 판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마을의 이것저것을 샀을 때 즐거움이 커야 하고 마음의 충만함을 느낀다면 또 사고 싶어서 다시 마을로 오겠지요.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농업에 관한 것입니다. 농업은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고, 또 농업이 농민만의 일도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서 사는 일이 어떻게 한쪽만의 일일 수 있겠습니까? 시장에서 사는 것도 좋지만 마을에서 직접 생산한 먹을거리의 매력은 몇 배의 즐거움을 줍니다. 단지 사는 행위만이 아니라 여행까지 곁들어지니까요. 오랫동안 마을에서 자리를 지켜온 자연의 신선함, 다양한 신비로움도 중요합니다. 계절마다 부는 바람 따라 다가오는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단지 사고파는 일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일입니다. 마을을 판다는 것은 함께 즐거움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마을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입니다.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생명의 근원이 마을에 있습니다. 사람이 홀로 살 수 없어서 생겨난 마을의 힘이 지친 누군가에게 회복의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가 질 무렵 강나루 건너 밀밭 길을 걷듯이 마을 길을 걸으며 느끼는 행복을 마음껏 가져가면 참 좋겠습니다.
6. 서두에서 이야기한 마을을 파는 사업단 일은 3년간 썩 잘 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수고한 이들의 땀방울만큼 모습이 잘 갖춰졌습니다. 인터넷으로 마을 여행을 신청할 수 있고 농산물을 편하게 구입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만들었고, 우리가 사는 마을 곳곳의 기반 조사도 했습니다. 그동안 마을을 팔기 위해 ‘처음 가보는 마을 여행’도 여러 차례 진행했습니다. 걸어도 보고, 차를 타기도 하고,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감성도 누리면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바닷가에선 파도 소리도 예사롭지 않고, 수억 년 전 공룡 발자국 앞에선 시공간을 잇는 놀라움도 누렸습니다.
찬찬히 보면 마을의 새로움은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던 것입니다. 지구 곳곳에 있는 마을은 다 나름의 포근함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한 마을부터 시작해서 여러 마을을 계속 여행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천혜의 절경이 없다고 해도 마을 구석구석은 잔잔한 감흥을 일으키기에 썩 괜찮습니다.
마을을 파는 일이 새해에는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잘 팔기 위해 매력 있는 마을을 만드는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이고요. 코로나19 시대 이후 치유의 원천으로서 역할을 마을이 잘 감당하도록 응원하는 것은 함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은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 수입개방 확대, 개발이나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기후 조절 역할 상실 등 구조적인 어려움에 부닥쳐 있습니다. 이 문제는 농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입니다. 특히 기후 위기 앞에서 자연과 사람의 융합 현장 중 하나가 마을이라면, 단지 마을 주민인 농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와 개인 삶의 질적인 전환을 위해서 관심과 협력이 필요합니다.7. ‘농업에 미래의 희망이 있다.’ 식상한 듯 보일 수 있지만, 2018년 농민신문이 주최한 포럼에서 세계적인 투자가인 짐 로저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먹어야 산다는 생존 법칙이 변하지 않는 한, 농업의 위기는 인간의 위기이고 농업의 생명력은 삶의 근본입니다. 큰 포부를 그리지 않더라도 농업의 현장인 마을의 가치를 우리 모두 공감하고 건강한 쉼을 주는 마을을 만드는 데 지혜와 조언을 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마을을 판다고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마을을 사는 일이 삶의 회복을 위한 즐거운 체험이라는 것을 함께 누렸으면 합니다. 한번 잘 팔아보겠습니다.
어쨌든 새해에는 코로나19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의 욕심 때문에 자리를 빼앗기는 일은 바이러스에게도 비극입니다. 비극이 커지면 사람도 살기 어렵다는 것을 지난 일 년간 온몸으로 절실히 체감했습니다. 마스크 하나만 벗어도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는데, 숨 크게 쉬며 마을 길 활보할 수 있다면 세상이 정말 새롭게 보이겠지요. 요즘 놀자는 말이 이렇게 다정할 수가 없습니다. 비행기 타고 세상 구석으로 가지 않아도 걸어서 가까운 마을 곳곳을 거닐며 놀 수 있습니다.
마을을 팝니다. 둘러보며 맘에 드는 마을을 장바구니에 담아가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