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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그날 첫눈이 왔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내렸다. 사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깥 날씨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날씨가 괜찮았다. 아, 다행이구나. 일기예보와는 다른데? 하면서 초등학교 아이들 등교를 돕는 차량 운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오산이 수원 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송이가 하나둘 날리기 시작하더니 삼십여 분이 못 돼서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순간 망연자실했다. 왜 하필이면 오늘 눈이 이렇게 내릴까? 그것도 첫눈이.
일기예보에서 눈이 온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내릴 줄은 몰랐다.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조금 전 출발했는데 눈이 내려서 가는 길이 힘들 다부터 시작해서 서해대교에 묶여서 꼼짝도 못 하고 있다는 등. 급기야는 인천에서 오는 이들은 당진에서 방향을 돌려 다시 인천으로 향한다는 등. 세상은 하얗게 덮여서 무척 보기 좋았지만, 그 즐거움마저 내리는 눈에 덮이고 있었다. 마음을 졸이는 첫눈이 내린 11월 26일 그날은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던,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가 함께 김장하기로 한 날이었다.
지난 9월 4일, 그러니까 이제는 해가 넘어간 2015년 9월 4일. 서울 종로에 있는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온생명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하 ‘온생명생협’)이 설립되었다. 온생명생협은 농촌에 빚을 느끼는 서울과 수도권에 있는 도시교회 소비자들이,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촌과 농촌교회에 힘을 주고 함께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설립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다.
사실 그동안 개신교 내에서 농어촌 교회를 중심으로 한 생산자 협동조합은 이미 이런저런 모습으로 만들어져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도시 교회 소비자를 주축으로 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은 그 수가 많지 않다. 불균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은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아무튼, 눈 때문에 애간장 녹이며 시작한 김장 행사는 그렇게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가 함께 힘을 모아 시작하는 첫 일이었다. 돌이켜보니까 첫눈은 축하 선물이었던 것 같다. 참석한 이들이 김장도 김장이지만, 첫눈 구경에 마음을 활짝 열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겨울에도 배추가 풍성하고, 양념류도 넘쳐나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김장을 하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우리 조상들은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김치를 많이 담가서 저장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지금도 여전히 김치는 밥과 함께 거의 주식으로 먹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어렸을 때도 어머니와 여러 사람이 모여서 김장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지만, 나이가 제법 들고 보니 김장이란 그저 김치를 담그는 행위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것, 특히 함께 일하면서 삶을 버무리는 김장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김장은 ‘마음 나누기’와 ‘함께 살기’가 모인 행위이다. 설령 혼자 김장을 하더라도 그 마음속에는 이것을 먹어야 하는 이들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김장은 자연을 배우고, 자연의 순리에 맞춰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가정마다 김치냉장고의 기세등등한 모습 때문에 이제는 김치를 어느 때 담그느냐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추위를 무릅쓰고 초겨울에 김장하는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김장하는 장소로 택한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수목원에서 농민들은 눈이 내리더라도 아침 일찍부터 김장 준비를 했다. 하루 전에 절였던 배추를 꺼내서 물기를 빼고, 큰 그릇을 준비해서 배추에 넣을 양념류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시 소비자들이 가져갈 김치 650kg과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전달해 줄 김치 200kg 분량이다. 생각지 않게 추운 날씨에 손이 곧기도 했지만, 바쁜 마음은 그래도 잘 참고 다음 일을 계속 챙겨나갔다. 돼지고기 삶을 준비와 더불어 가마솥을 화덕에 잘 올려서 언제라도 불을 땔 준비도 마쳤다. 농촌의 인심을 보여주기 위해 그 와중에 두부 만들기 준비도 잘 이루어졌다.
마치 영화 촬영을 위해 모든 소품을 제 자리에 알맞게 가져다 놓은 느낌이었다. 이제 사람들이 오는 대로 감독의 큐사인만 떨어지면 각자 맡은 장소에서 힘을 모아 한바탕 잔치가 시작될 모양새다. 눈 때문에 미처 이곳까지 오지 못해 돌아가는 사달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김장을 위해 40여 명의 일손이 마음을 모으니 마치 한 마을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이웃 사촌과 같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온생명생협 김광욱 사무국장은 이런 활동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시작 단계라고 볼 수 있어요. 오늘 이 모임이 좋은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이런 의식을 갖지 못한 분들도 많이 있는데, 앞으로 도시와 농촌이 상생할 수 있는 구조를 더 많이 연구하고 의식을 퍼뜨리는 교육 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나갈 계획입니다.”
수다도 떨면서 김장을 하는 가운데, 점심은 우리 지역 축산 농가에서 나온 돼지고기로 수육을 만들고, 갓 담근 김치와 함께 유쾌한 웃음을 수북하게 준비했다. 금방 만든 두부도 나누고, 뜨거운 바지락 국물도 다들 쭉 들이켰다. 김장하기를 마무리하고 오후 3시부터는 가까이 있는 유기농 목장에도 들르고, 지역 전략 식품 산업 육성을 위해 만들어진 양돈클리스터사업단도 방문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온 소비자들은 생산지의 현황을 살피고, 생산자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이들의 고충도 듣고 건전한 소비 형태에 대한 고민도 나눌 수 있었다.
현장을 돌아보는 가운데 그중 한 분은 김장을 하기 위해 농촌까지 온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저는 농사에서 가장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농사가 창조질서에 맞게 지어져야 한다는 걸 농촌 교회 교인들과 목회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시장경제 속에는 이게 살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도시 교회가 나서서 소비자 생협도 만들고 이분들과 더 자주 만나서 이런 행사도 열면 결국에는 땅도 살고 물도 살고 농촌도 살고 농부도 살지 않을까요. 그런 마음으로 이곳에 왔어요.” 결국, 함께 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눈발은 도시 소비자들이 돌아가는 시간까지 흩날렸다. 하지만, 그들이 머물다 간 수목원은 눈꽃으로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서 보는 사람마다 기쁨의 탄성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50여 일째 비가 내린다. 중간에 눈도 왔지만, 애타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가을 가뭄 걱정을 무색하게 초겨울에도 비가 내린다. 가뭄 걱정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확실히 이상기후라고 할만하다. 지구 기후 변화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는 가운데, 11월 30일부터 12월 11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제21회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가 열렸다.
유엔 기후 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란 1988년 지구 온난화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국제 연합(UN)에서 설립한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에 속한 나라들의 회의다. 이 총회에선 ‘인간 활동으로 발생한 온실가스 배출이 지구 기온을 높인다.’는 첫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1995년 발표한 2차 보고서에선 2100년경 지구의 평균 기온이 현재보다 3.5℃까지 높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1997년 세계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평균 5.2% 줄이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동안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번 회의 후 과연 어떤 노력이 나올지 궁금하다. 이번 회의에서 190개 나라가 스스로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노력을 다하겠다는 약속(INDCㆍ실현 가능한 온실가스 목표를 담은 자발적 기여 방안)을 내놓았고, 우리나라도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약 37% 줄이겠다는 약속을 내놓았다. 지구 멸망의 그림자 앞에서 함께 살 길을 가기 위해 힘을 모으자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각국의 온살가스 감축 방안에 대해 '국제법적 구속력'도 없고, 또 각국의 감축계획을 모두 합쳐도 기후재앙을 막을 지구 온도 2도 상승을 훨씬 웃도는 2.7도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다들 걱정하는 현실의 문제는 돈 문제다. 돈 문제는 가장 험난한 주제이다. 어려운 나라들은 기후도 기후지만 당장 먹고 사는 재원이 필요하고. 선진국을 비롯한 각국의 엇갈린 이해관계는 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산업혁명 이후 일어난 지구 온난화는 지구 역사상 그 전례가 없다고 하는데, 결국 산업혁명에 맞물린 인간의 탐욕이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답도 없이 키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지구의 생태계에 인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건 산업혁명 이후 약 200년으로 본다. 오죽했으면,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네덜란드의 파울 크뤼첸 박사는 지난 2000년,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지구를 망칠 수도 있다는 뜻에서 산업혁명 이후를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人類世)로 명명했을까. 어떻게 할 것인가? 기후 변화에 관한 회의를 백 번을 한들 과연 뾰족한 방안을 도출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답은 비관적일 만큼 명확한 것 같다. 해수면 상승으로 수십 년 내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몰린 아름다운 섬나라인 몰디브, 투발루, 마셜제도, 키리바시 사람들의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고 말이다. 여전히 파리에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회의가 열리건 말건 정작 일반적인 우리는 그 마음에 큰 관심이 없고, 홍수나 가뭄도, 동식물의 멸종도 당장 ‘나’에게 닥치지 않으면 그저 ‘남의 일’일 뿐으로 여기고 있지만.
제러미 리프킨은 “참으로 우리에겐 지구에서 이번 삶이 전부다. 누구도 도망하거나 숨을 곳은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엔트로피 수치가 지구를 감싸고 대량 전멸이란 카드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가 지구에서 사는 동안 함께 사는 일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숨을 곳 없는 지구에서 함께 사는 일은 거시적인 합의가 필요하고, 미시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지난가을은 비가 자주 오다 보니 밭작물을 거두는 일이 힘들었다. 특히 연로한 농민들이 질퍽거리는 밭에서 일하다 보니 그 후유증이 컸다. 경운기나 트랙터 같은 기계가 있다고 해도 질퍽거리는 땅에서는 힘을 쓰기는 어려웠다. 일하기 위해 임금을 주고 사람을 부르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 많은 배추를 출하하는 일도 어렵거니와 더구나 값이 폭락한 배추밭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힘들었다. 한 번씩 밭에 들어갔다 오면 진흙투성이 어서 그걸 털어내느라고 난리다. 생전 가야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안 하던 마을 부녀회장도 이번 가을은 정말 힘들다고 한숨을 내 쉰다.
이렇게 초겨울까지 비가 내리는 일을 기상청에서는 엘니뇨 현상으로 이야기 한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장기적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툭하면 이상한 날씨가 백 년 만이니, 오십 년 만이니, 이십오 년 만이니 하면서 나타나니 농사짓기도 힘들고 늙은 농촌을 지탱하기도 어렵다. 기후변화 이야기를 했지만, 확실히 프랑스 파리에서 이루어진 회의와 한국 농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연관이 있다. 물론 그러니까 회의를 하는 것이겠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본다. 무엇인가 답은 없을까? 그리고 자답(自答)한다. 설령 기후변화가 아니더라도 함께 살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함께 사는 실천 외에는 답이 없다고. 거리가 멀리 떨어졌어도 키리바시 사람들도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온생명생협은 이번 김장 행사의 제목을 ‘친정텃밭 김장여행’으로 정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남이 아니기에 도시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찾아가듯이, 또는 친근한 형제를 찾아가듯이 마음을 터놓고 김장을 하자는 의미였다. 농촌에서도 김장값을 정할 때 고민을 했다. 비록 날씨가 좋지 않은 가운데 힘들게 수확한 농산물이었지만, 과연 김치 10kg에 얼마를 책정해야 할까? 누가 먹어도 부끄러움이 없이 우리 지역에서 정성껏 생산한 재료만 사용하는 데도 농민들은 값을 매기기에 부담을 느꼈다. 혹시라도 도시에서 온 분들이 비싸다고 여기면 어떻게 할까? 조금이라도 더 싸게 해야 하지 않을까? 오랜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시교회 소비자나 농촌교회 생산자 모두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일이 거대담론에 비하면 보잘것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살기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탐욕으로 더욱 커진 기후변화 문제를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는 그렇게 회의를 해 나가고, 지구 한쪽 보령시 천북면에서는 도시 사람 농촌 사람이 이렇게 모여 함께 사는 일을 나누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예년에는 없던 이상한 초겨울 비를 바라보며 함께 살기 위한 실천적인 환경 이야기도 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먹을거리도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누구인지 돌아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는 훈련도 필요하다.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어도 서로가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일은 곧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소리를 들어도 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한국을 방문한 아노테 통(Anote Tong·63) 키리바시 대통령에게 “키리바시가 2050년이면 지구위에서 사라진다는 예측이 맞느냐”고 기자가 묻자 아노테 통은 “맞다”고 말하며, 덧붙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