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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어제가 돼 버렸다.
요즘 몸 균형이 무너져서 운전하기가 힘드니 밖으로 나갈라치면 누군가 도와줘야 한다.
제일 만만하고(?), 편한 것은 아무래도 아내다.
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렸는데, 치과엘 다녀오느라고
집에 온 시간이 오후 5시가 넘었다.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
몸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았고, 그것보다는 며칠 전 본 궁남지 연꽃 생각에 아무래도 연지 공원엘 가고 싶었다.
연지 공원은 고암 이응로 생가 기념관에 조성된 작은 못의 이름이다.
그래도 올망졸망 피기 시작한 연이 이제는 제법 수려한 연못을 만들어서 지나가는 사람 발길을 잡기에 충분하다.
고암 이응로 생가 기념관은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 있다.
2011년 11월 8일에 개관했으니 아직 2년은 채 되지 않았다.
전시된 작품을 보러 가끔 가는 곳이고, 주변 풍경과 함께 기념관 건물과 환경이
생태적으로 잘 조성되어서 차분한 느낌이 좋은 곳이다.
그래도 중계리에 있는 생가 기념관은 아직 낯설다.
오히려 수덕여관으로 마음에 남아 있는, 예산 수덕사 바로 아래 그의 흔적이 아직은 더 친근하다.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1944년에 사들여 작품 활동도 하고, 6·25전쟁 때는 피난처로 사용한 곳이다.
수덕여관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응로 화백 본부인인 박귀옥 여사의 집이다. 여자로서 애한이 담긴 집이다.
2001년 박귀옥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이후 수덕사에서 사들여 복원하면서 템플스테이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지금은 예전의 돌계단 입구는 봉쇄되고 수덕사의 개찰구를 통해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표를 끊고서.내 기억에는 참으로 아늑한 식당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나름 즐거운 추억이 수덕여관 식당에 있다.
그때는 손님이 오면 거의 수덕여관 식당으로 갔다. 수덕여관 자체가 식당으로 영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뜻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갈한 방의 분위기가 좋았다. 창호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도 좋았다.
그리고 거기서 이응로 화백의 마음을 봤고, 그의 아픔을 조금씩 알게 됐다.
더불어 나혜석, 박귀옥, 박인경 등 그녀들의 이야기도 듣게 됐다.
수덕여관 앞에 놓인 커다란 바위에는 추상화와 같은 오묘한 작품이 음각되어 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조작된 간첩사건인 동백림사건으로 강제 귀국했을 때, 고통스런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문자적 추상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응로(1904년 1월 12일~1989년 1월 10일)는 대한민국 태생의 프랑스의 동양화가이다.
일단 여기서부터 말이 이상하다. 대한민국 사람인데 프랑스의 동양화가라니....
한지와 수묵 등 동양화 매체를 사용, 스스로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 붙인
독창적 예술 세계를 창조한 고암(顧菴) 이응로는 1904년 1월 12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4년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이름을 드러낸 후, 1948년에는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있었다.
54세 때 프랑스로 건너갔다. 2년 만에 대화랑 폴 파케티와 전속계약을 맺고, 첫 개인전을 열었다.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우고 1965년엔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비극이 발생했다. 1967년,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의 동베를린에 갔다가
중앙정보부의 동베를린간첩단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귀천'으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도 혐의자 중 한 사람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다. 천상병 시인은 이후 행려병자 신세로 전락할 만큼 폐인이 돼 버렸다.
(*2006년 1월 과거사 진실규명위에서는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 접촉을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했다며 정부에 사과를 권고했다.)
이응로는 프랑스 정부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이 사건은 그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얻어 고국과의 공식 인연을 끊었다.
그러나 인연이 그리 쉽게 끊어질 수는 없는 일. 그의 마음속에는 늘 고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찼다.
파리에서 동포들을 만나면 작은 그림이라도 한 점씩 나눠주곤 했다.
그리움이 병이 되었는지 1989년 고국에서 기획한 초대전 전시회 첫날 파리 작업실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예술의 대가들이 묻힌 파리시립 펠 라세즈 묘지에 안장됐다.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정작 기념되어야 할 것은 고통이지만, 고통은 아직 그 길에 서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힘겹다.
연지 공원에 도착하니 비가 조금씩 흩뿌렸다.
날씨도 흐릿해져서 사진찍기는 좋은 시간이 아니었다.
가끔 오가던 사람들의 모습도 조금 있으니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몇 장을 담았다. 여기도 부여 궁남지처럼 연꽃이 활짝 피지 못했다.
바람이 불고 연잎이 흔들린다.
천천히 예술과 고통의 진흙 속에서 하나씩 꽃이 올라온다.
바람에 떨어진 연잎이 하나 둘 날리기도 한다.
기념관은 늦은 시간이라서 문이 닫혀 있지만,
풀 한 포기라도 모두 자기 자리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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