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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꿈꾸는아이들
2010. 11. 10. 08:58
(*낙동초등학교에서 방과후학교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김지영 선생님 글입니다.)
혹시 피아노 소리가 마음으로 전해지고 아이들 몸짓이 건반에서 스며 나온다면 어떨까?
그것도 푸른 잔디 사이에서 사그라지지 않고 빛나고 있다면···.
여기 작은 손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가 있다.
푸른 운동장을 가지고 있는 보령시 천북면 낙동초등학교는 전교생 48명인 작은 농촌학교다.
그러나 그 작음 속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보석과 같은 아이들이 촘촘히 자기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이 아름다운 학교에서 나는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인 피아노를 담당하고 있다.
처음으로 아이들을 만났을 때가 기억에 새롭다. 몇 명 외에는 피아노에서 '도'가 어디에 있는지, 계이름도 박자도 전혀 모르고 있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붙잡고 해가 지도록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정해진 방과후학교 시간은 내게 허락된 아이들을 꼼꼼하게 봐 주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피아노를 배울 수 있어서 꿈에 부푼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그래, 시간이 가도 아이들과 함께 한 번 해 보자"하며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자 현실은 쉽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 안에 악보 익히랴 손 모양 잡으랴 박자 지키랴···.
그래도 아이들은 서투르게나마 자신이 누르는 한 음 한 음에 마음을 모았다.
1학년 승주는 피아노를 잘 치고 싶은데 악보 익히는 것과 박자 지키는 것은 모두 귀찮다.
그냥 맘껏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연주하고 싶은 승주.
그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피아노 건반 위를 마냥 뛰어다는 승주를 상상한다.
‘그래 승주야. 너는 건반 위에 올라가 위에서 저 아래 건반까지 맘껏 뛰어다녀 보렴. 그리고 세상에서 너만의 곡을 멋지게 연주해 보렴.’
힘찬 응원과 함께.
2학년 현정이와 정윤이는 서로를 보면서 배우고 싶은 욕심이 많다.
먼저 새로운 곡을 배우게 되면 뒤쳐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지. 그 모습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3학년 영재는 너무 힘을 많이 줘서 손가락 마디가 자꾸 휘어졌다.
기도 덕분일까? 영재의 손이 드디어 변하기 시작했다. 달걀을 쥔 듯 부드럽고 가볍게 연주하는 모습에서는 편안함도 보였다.
스타카토가 그렇게 어려웠던 성진이는 오른손이 스타카토 왼손은 레가토인 것을, 오른손인지 왼손인지 하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어~휴! 머리야. 선생님 헷갈려요.”
피아노 건반보다 나를 더 바라본다. 성진이의 답답한 마음을 충분히 안다.
"그래, 성진아. 처음엔 다 그런 거야.”라고 얘기하면서 나부터 용기를 내고 성진이와 함께 다시 자리에 앉는다.
하기 싫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하는 아이들.
흥미를 가지고 재미있게 열심히 배우는 아이들.
모두들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또 천천히, 그렇게 하나하나 익히다 보니 이젠 제법 악보도 보고 박자도 지키며 한 곡 한 곡 연주하게 되었다.
처음엔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했었고 그런 줄 알았다. 그리고 빨리 무엇인가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내게 있는 작은 것을 나눠 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욕심일 뿐이라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과 느리지만 천천히 그렇게 함께하는 동안 그 속에 담겨진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 곡을 연주하게 되기까지 아이들은 어렵고 힘든 것을 잘 참고 인내하며 연습하고 연습한다.
그래서 익숙해 질 때면 아이들의 얼굴에선 환한 빛이 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이 내겐 어떤 선물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세상에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있었던가!
급하지 않게 느리지만 천천히 익히고 익히다 보면 어느새 열매가 맺혀지며 그로 인해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피아노를 통해서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배우는 학생이 된다.
이렇게 피아노 소리가 마음으로 전해지는 낙동초등학교.
피아노를 배우는 것과 더불어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각자에게 주어지는 소중한 것들을 급하지 않게 천천히 배우고 익혀서 기쁨의 열매들을 충만히 맛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요즘 나에게 더해진 즐거움은 방과후학교 피아노 시간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1학년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는 것이다.
저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아이들 손을 잡으며 새롭게 마음을 나눈다.
그리고 가지런한 피아노 88 건반을 보며 이 건반 수만큼 뛰어다니는 낙동초등학교 아이들을 꿈꾼다. 덩달아 보석과 같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와 협연하는 피아노 소리는 희망의 노래로 크게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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