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평상에서 여름 저녁 바람과 밥상을 같이 받다가, 바람결에 묻어온 치자꽃 향기에 먼저 배부른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름도 몰랐지만, 치자꽃향은 어린 시절 꿈같은 날의 상징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평상 주위에 물고기 감싸 안은 산호초도 있었고, 갖가지 장미도 색색 어우러져 여름밤이 어둡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얀 치자꽃은 저녁 시간과 맞물려서인지 담백한 흑백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쥐똥나무꽃도 그렇군요. 속동마을에서 역시 저녁 무렵, 바람 타고 날아온 향이 마치 어릴 때 치자꽃향처럼 내 몸을 이끌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 향의 정체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 바닷가 언덕에 마치 울타리처럼 자리 잡은 쥐똥나무를 발견하고 그 하얀 꽃향기에 배가 불렀습니다. 치자꽃향과 쥐똥나무꽃향은 내게 가장 좋은 꽃향기입니다.
향은 아니어도 그 모습에 마음이 뛰었던 상사화. 오래전에 오천 충청수영성에 꽃마리를 사진에 담으려고 갔다가 지금과 달리 겨우 몇 송이 핀 상사화를 보고 하마터면 꽃마리를 잊고 돌아올 뻔했습니다. 여름이면 충청수영성에 피는 상사화를 봅니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것보다 군데군데 수줍어 핀 상사화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기억합니다.
기억에 담아 둔 꽃은 색이 없습니다. 그 모습이 좋기에 꽃은 색으로 남지 않아도 은은합니다. 몇 날을 피는지 하염없이 지켜본 백일홍. 한 번 피면 나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은 꽃입니다. 이번 여름 유난했던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 있는 백일홍도 기억에 들어갑니다. 이 또한 색이 바래지고 남지 않아도 돌아보면 여전히 곁에 있습니다.
꽃은 마치 사진처럼 지난 시간, 마음을 아리게 하는 그 시간을 끄집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향으로 시간을 보여주고, 수줍음으로 시간을 붙듭니다. 마치 윤동주의 '별 헤는 밤'처럼...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내게는 별이 꽃이 됩니다. 꽃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詩)와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꽃은 지지 않고 우리 마음에 기억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부드럽지만 때로는 어느 순간, 강력하게 나를 찌릅니다. 화들짝 놀라서 새삼스레 꽃을 봅니다. 그리고 꽃이 이끄는 그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꽃은 참 요상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