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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글을 썼던 존 버거의 사진글을 인용합니다.
“사진은 보이는 것들의 기록이다. 사진이 예술 작품보다는 심전도 기록에 가깝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사진의) 환상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사진은 대부분 예술이라는 범주의 바깥에 있다. 사진은 주어진 상황에서 실행되는 인간의 선택에 대한 증거다. 하나의 사진은 이 특정한 대상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진가의 선택의 결과다.”<존 버거, ‘사진의 이해’ 제프 다어어 엮음 김현우 옮김 열화당>
존 버거는 사진의 선택이란 X와 Y 중에 무엇을 찍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 아니라, X의 순간에 찍을 것인가 Y의 순간에 찍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진의 가장 대중적인 용도가 X의 순간에 담은, 혹은 Y의 순간에 담은 부재하는 이들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진이 언급하는 것은 모두 사진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장의 사진은 보이는 것을 기록하면서 언제나, 그리고 그 본성상,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불러냅니다.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입니다. 광학적 특성이 담긴 사진은 회화와 다릅니다. 카메라가 담아내는 지극히 일상적이거나 혹은 아예 대단히 추하고 보잘것없는 것들도 나름 가치를 지닙니다. 사진의 힘은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내리게 하고 일상적인 것을 모으고 나누는 데 있습니다.
2. 거의 30년을 마을에서 살면서 그동안 사진을 배우고 이런저런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아마 마을에 온 지 7년 정도 지나면서부터일 겁니다. 지나간 30년이란 시간은 30대 젊은이를 60대 중늙은이로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더니 마을 사람들이 많이 떠나간 지금 그 자리에 대한 기억을 사진이 대신합니다. 한때는 사진을 예술처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사진을 자주 대하다 보니 사진은 기록으로 말한다는 의미를 더 깨닫게 됩니다.
마을에서 사진의 필요성을 처음 느낀 것은 마을 곳곳에 피어난 작은 꽃들에 관해 공부하면서입니다. 이름도 알고 싶고, 생태적 특성도 알고 싶어서 이것저것 찍기 시작했습니다. 일상에서 이미지로 다가온 꽃은 의외로 사람들의 기억을 불러왔습니다. 한 장의 사진에 여러 이야기가 흘러들었고, 사진의 의미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꽤 괜찮았습니다. 꽃과 함께 사람도 찍었지만, 사람을 찍는 일은 아직도 서툽니다. 이상하게 꽃은 이리저리 둘러봐도 모습이 그렇게 변하지 않아서 찍을 만한데, 사람은 늘 변화무쌍(?)합니다.
사진으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은 마을에서 벌인 사진 전시회였습니다. 처음에는 마을 주변 들꽃 사진을 전시하기 시작했고, 마을의 모습도 사진에 담아 전시했습니다. 어느 때는 마을 학교 장학금을 모으기 위해서 사진을 팔기도 했습니다. 제법 팔렸습니다.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 않았고, 또 장학금을 모은다니 좋은 일이어서 같이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사진을 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판매하다 보니 어떤 요령(?) 같은 것이 생겼는데, 어떤 사진이 잘 팔렸느냐면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나온 사진, 특히 자기 집이 나온 사진입니다. 어떤 이는 밖에 나가 사는 자녀들에게 준다며 집이 나온 사진을 10장이나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 식당에 가면 그렇게 팔린 사진들이 벽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먼지도 잔뜩 묻어 있고 오래된 사진인데도 귀찮아서 뗄 생각을 안 하나 봅니다.3. 사진을 알고 나니 사진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김우룡이 엮은 ‘사진과 텍스트’(눈빛사)의 글을 인용합니다.
“사람은 최초에 그림으로 자기 뜻을 표명하다가 문자를 만들어 의사를 소통했다.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은 수천 년 인류 역사를 이끌었다. 그러나 사진은 생겨난 지 200여 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제 문자의 축약 전달 방식을 바꿀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발터 벤야민은 문자나 회화 등의 먼 아우라로부터의 해방이 사진을 통해 담보되는 듯이 보인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는 사진을 통하지 않고는 다른 단계로 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글자를 모르는 것보다 사진으로 소통하는 것을 모르면 우리가 사는 삶과 세상을 알아차릴 수 없다. 돌아보면 우리 일상은 하루에도 수많은 사진을 보고 사진으로 소통한다.”
실제로 오늘 무엇인가를 경험한다는 것이 그 경험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것, 혹은 사진으로 본다는 것과 같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 8월에 서울과 수도권을 강타한 역대급 물 폭탄이라는 기습폭우도 사진을 통해 생생해졌고, 코로나19 바이러스 사진부터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찍어 전송한 수천 년 전의 별빛 모습까지 모든 것이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경험 속으로 들어옵니다. 사실 사진은 탄생(?)하면서부터 인간사 전반의 영역으로 자신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사진이 역사적 의미에 값하기 시작한 속도는 무척 빨랐습니다.
4. 요즈음 사진 몇 장을 보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에 사진 이야기도 할겸 사진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공동체의 기억을 사진으로 소환하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그냥 막 찍은 사진 한 장으로도 공동체의 기억을 소환할 수 있으니까요. 공동체란 가족일 수 있고, 추억을 같이하는 옆집일 수 있고, 마을 울타리 안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넓게 보면 어느 곳에서든지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도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X의 순간이 아닌 Y의 순간에, 또는 Y의 순간이 아닌 X의 순간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기념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기억은 글이나 회화보다도 사진 속에서 더 직접 다가옵니다.
목포에서 녹이 슨 세월호를 사진에 담아 온 뒤로 세월호는 사진을 통해 아픔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지난 6월 30일(목) 서울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용산역에서 우연히 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인들과 관계자들이 쏟아지는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회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은 뒤로 역시 공동체 의식이 생겼습니다. 사진 안에서 드러나는 애절한 모습은 오래전 논물을 대다가 감전사로 물에 잠겨 세상을 떠난, 지금도 얼굴이 선명한 마을 사람의 모습이 중첩되고, 온몸에 장애가 있음에도 씩씩하게 농사를 지으면서 자녀들을 키워내고 여전히 삶을 압박하는 불편과 동거하느라 애쓰는 마을공동체가 연결됩니다.
기억을 담은 사진, 그 사진을 찍는 것, 혹은 사진을 보는 일은 우리 일상을 다시 연결합니다. 오늘도 무수히 많은 사진이 하루를 뒤덮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진들은 경험이 되고 연결이 되고, 생각 없이 찍었다고 여겨지는 그 사진도 내일은 사진 예술가(?)들이 찔끔거리는 오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일부러 공동체 기억을 소환할 수는 없겠지만 사진은 그 기억을 내 생각보다 더 오래 가지고 있습니다.
5. 많은 미디어에 둘러싸여 싫든 좋든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시대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대하면서 인정하지 않고 싶더라도 나도 모르게 사진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통합니다. 선택한 사진은 문자의 축약방식을 넘어서서 이미지 자체로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분노와 슬픔은 더 직접적으로 전달합니다.
지난 8월 기습폭우에 조금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안타깝게 숨진 가족이 살던 신림동 반지하 주택 침수 현장에서 찍은 대통령 홍보 사진에는 약자의 참변과 정치의 참담함이 오롯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우리 일상의 모습입니다. 존 버거의 말대로 사진이 심전도 기록에 가까울 수 있다고 본다면, 사진 속에 나타난 모습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하나하나 체크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사진에서 예술을 찾을 수 있고 그렇게 사진을 찍음으로 사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사진을 그렇게 소통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실제 사진의 역사에서 예술의 가치를 찾는 일을 빠트리면 안 되었으니까요. 여기서 사진을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를 기억하고 연결하는 기록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지를 통해 그 이미지와 우리의 관계를 알아보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공동체는 이제 사진을 통해 넓게, 아주 넓게 연결됩니다. 세월호도 그렇고 우크라이나도 그렇습니다.
기록으로 말하는 사진은 보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사진은 그 사진을 찍은 시간에 기록할 가치(천차만별이겠지만)가 있다고 여긴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사진은 당시에는 미처 보지 못한 것까지 나열할 뿐이고, 그 사진을 보는 우리는 사진 속에서 우리와 관계를 찾아야 합니다. 소통이 필요합니다. 소통을 통해서 사진 속에 나타난 삶의 조건을 볼 수 있습니다. 사진 한 장마다 소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상적이면서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아카이브로써 사진만이 사진 속에서 우리의 평범한 삶을 드러내 줍니다. 그럴 때 형편없이 취급했던 사진에서도 뭉클한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6. 사진 자체는 말이 없습니다. 글처럼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처럼 상상으로 그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진은 구체적인 정황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정황은 단편적인 것이 아닌 삶의 이야기가 모인 현장입니다. 아카이브로서 사진입니다. 어떤 이들의 핸드폰에 저장된 그 많은 사진. 제게는 마을에서 담은 수년간 사진이 그렇습니다. 어떤 장면이 떠오르더라도 그 사진이 어느 곳에 있는지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차분히 한 장 한 장 들추다 보면, 이름도 없고 소박하고 평범한 모습들이 이어지면서 왜 이리 정겨운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가 눈으로 보는 그 모습이 왜 이렇게도 마음 한편에 아려오는지.
잠시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킬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요? 어떤 목적으로 사진을 이용한다면 그 목적에 국한해서 특별할 수도 있겠지만, 누구라도 찍을 수 있는 사진, 평범하고 아무렇지 않은 순간이 사진 안에서 계속 쌓여가며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모습을 보면 오늘 나도 나이가 들어가지만 내 앞의 순간들을 평범하게 이어가며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계속 사진을 찍을 동기가 생깁니다. 사진은 그냥 사진 찍듯이 찍는 겁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틀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기교를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찍든 사진의 이미지는 실제의 대상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고, 어느 순간 사진 속 이미지는 실재를 기억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7. 보령 ‘문화의전당’에서 주 1회씩 10주 정도 제가 사는 보령을 돌아보는 강좌를 진행했습니다. 역사도 이야기하고, 종교도 이야기하고, 자연과 환경도 이야기하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장소를 직접 보며 사진도 찍는 여행을 했습니다. 제게도 의미가 있었고 참여한 수강생들도 보람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그렇게 찍은 사진을 펼쳐서 한 장 한 장 봤습니다. 현장에 가서 직접 볼 때도 좋았지만, 사진을 통해서 함께 했던 공간을 보니 이리저리 사진 속의 모습과 자신의 기억을 연결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핸드폰으로 툭툭 찍은 사진들이지만 여러 사람의 사진이 모이니 아카이브의 기능을 합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줄줄 나옵니다. 벌써 시간이 흐른 만큼 기억의 통로로서 사진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마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보면 또 다른 감흥이 생기겠지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진을 배우고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런저런 강좌들을 통해서 사진 보는 법을 익히고 사진으로 소통하기를 나누겠다고 알렸습니다. 이왕 찍는 사진, 그 사진 한 장이 내 삶의 이야기를 잇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사진을 넘어서 날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이 기념해야 할 그 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마을의 기억은 그렇게 쌓이고, 사진으로 연결된 공동체는 어느 곳에서든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말을 걸어오겠지요. 켜켜이 쌓인 사진을 들추며 기억을 찾다가 이런 글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눈은 아직 가려진 다른 사진을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