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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기, 함께 산다는 것…이런저런글 2022. 6. 10. 09:50
1. 커피 한 잔 마시려고 수목원 카페에 들렀는데, ‘옆 마을에 상(喪) 난 것 아시느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어느 집에 상이 낫는지 다시 물었습니다. 하루 전에 세상 떠난 이는 50을 갓 넘긴 여성인데, 중학생 시절부터 몸이 아파 집 안에만 있다가 최근에 몸이 극도로 약해져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을에서 산 지 꼭 30년이 되었고 옆 마을도 자주 다니면서 마을 사람을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상이 난 이야기는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아픔이었습니다.
조금 더 알아보니, 어려서부터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고, 몸도 허약해서 주변에서는 신병(神病)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무당이 되기 전에 이유 없이 앓는 병을 신병이라고 통칭하는데, 정말 신병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 같으면 병원에서 정신과 진료와 약물 치료를 통해 호전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에는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요.
아무튼, 조문을 갔습니다. 장례식장에 놓인 사진을 보니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나이를 보면 막내 동생뻘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렸습니다. 문상을 와줘서 고맙다고 손을 내미는 부모님 얼굴이 친근합니다. 마을 일하며 가끔 뵈었고, 특히 마을 축제 때 열심히 동참했던 분들입니다. 참 몰랐습니다. 집에 이렇게 아픈 딸이 있었다는 것을. 아픈 시간을 지금까지 견뎌왔다는 것을. 그 아픔이 이제 더욱더 커진다는 것을….
2. 그동안 늘 마을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내려고 했고,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멀리서라도 그 어려움을 나누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마을 사람들과 소통이 되면서 이런 일 저런 일도 하고, 특히 아픈 사람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하면서 50여 년을 살아온 누이 같은 사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가까이서 30년을 살았다고 생각하니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한심스럽기도 했습니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후부터 마을 길이 새삼 낯설어지기도 합니다.
마을에 올 때부터 미약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삶을 염두에 뒀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일부분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농촌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의욕이 앞서기는 했지만, 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서울로 열심히 실어 날랐고 마을 사람들과 이곳저곳 여행도 다녔습니다.
간혹 구급차(?) 운전사 역할도 했습니다. 논에 물 대다가 연결된 전선에 감전된 마을 사람을 싣고 지역 의료원 응급실로 냅다 달려간 일도 있었고,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도 여러 번 실어 날랐습니다. 나중에 진료비용 청구 전화를 받고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마을 각 가정에 있는 예쁜 화분을 모아 축제도 하고, 폐교 위기에 처했던 마을 학교도 15년 넘게 관여했지요.
지금도 마을의 일부분으로 살아가고 있고, 다른 부분들이 함께 건강해야 우리 모두 건강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을을 잘 모르고 있었고 함께 산다는 의미를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을 요즘 깨닫습니다.
3. 5월 하순 경에, 안동에 있는 경안대학원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생명공동체학교 줌(zoom) 강의를 했는데, 중남미 자메이카 목회자들이 줌으로 참여했습니다. 동남아시아나 연해주 쪽 목회자나 평신도들은 대면으로도 여러 번 대할 기회가 있었지만, 중남미 쪽 사람들은 처음이었습니다. 강의안은 구글 번역기 도움을 받아 전달했고, 줌 강의는 통역사가 잘 전달해줘서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공동체학교는 코로나 이후의 시대, 지방소멸의 위기,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미래지향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며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만든 과정입니다. 저는 마을과 삶을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자메이카 목회자들이 줌 강의에 참여한 것은 그들도 역시 자메이카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일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은 농촌 마을에서 문화를 기반으로 함께 사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문화는 언제나 삶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강의안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 결국, 마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모습과 자원들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마을의 변화와 삶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마을에 있어야 할 것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작은 학교라도 살아남도록 해야 하고, 마을을 둘러싼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토대는 늘 만지고 보수해야 한다. 이런 일은 인위적 노력만으로는 힘들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즐거운 동력이 필요하다. 중요한 동력은 문화의 힘이다. 마을에서 문화란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마을의 감성을 드러내고, 그 감성에 연결된 각각의 고리를 통해 마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가치를 함께 누리는 일이 마을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요즘 마을 문화가 사라졌다고 한다. 사실 마을이 예전에 가졌던 많은 것이 사라지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사람 사는 곳에 어찌 문화가 없을까? 이런 생각에는 미디어의 영향으로 도시적인 것만을 문화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을 테고, 인구 감소로 말미암아 마을공동체가 위축되니 공동문화의 생산이 없어지는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 마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습 자체가 훌륭한 문화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면, 어렵지 않게 농촌에서 즐거운 마을살이를 할 수 있다…“
함께 사는 일에 한 가지 답만 있을 수는 없겠지요. 자메이카 목회자들은 마을에서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려는지 궁금합니다. 제게도 언제나 숙제입니다.
4. 며칠 전에 박재학 할머니가 전화했습니다. 올해 나이가 여든넷입니다. 당진에 있는 요양원에 계시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얼굴을 뵌 지가 한참 되었습니다. 잘 걷지도 못하시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또박또박 들려옵니다. 코로나19 유행하기 바로 전에 요양원에 가셨으니 마을에서는 함께 28년을 살았습니다. 처음 마을에 올 때, 살 집을 짓는 동안 박재학 할머니 집 문간방에서 몇 달 있었습니다. 참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도 들려주었고요. 농사를 지으면서 처음 거둔 것은 늘 가져다주시곤 했습니다. 요즘도 요양원은 여전히 면회가 안 되니 답답한가 봅니다. 손주 이야기도 하고, 백신 주사 맞은 이야기도 하고, 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주고받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함께 산다는 의미가 다시 다가옵니다. 비록 가까이 있지는 않아도 보고 싶어서 전화로 다정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이것도 함께 사는 것이 될 수 있겠지요. 마을에서 요양원에 가 계시는 분이 여러 사람입니다. 박재학 할머니처럼 거동만 불편하면 전화라도 할 수 있는데, 이구자 할머니처럼 뇌출혈 후유증으로 생각은 또렷해도 언어장애가 오면 전화도 할 수 없습니다.
이구자 할머니는 마을과 집에 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지 보름 전에 요양원에서 아예 퇴원하고(외출이 안 되니까) 자녀들 도움으로 이틀 일정으로 집에 다녀갔습니다. 집으로 가보니 휠체어에 앉아서 저를 보고 배시시 웃습니다. 말씀은 못 해도 말은 알아듣습니다. 손을 잡고 저는 입으로 말하고 이구자 할머니는 눈으로 말을 했습니다. 봄볕도 따뜻해서 포근한 그날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구자 할머니는 다시 수도권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했고, 면회는 안 된다는 소식을 자녀들이 전해줍니다. 마을에도 요양원이 꼭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생깁니다.
5. 축구선수 손흥민 아버지인 손웅정 씨가 어떤 방송국과 인터뷰하면서 했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축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고 흥민이와 동료 선수들의 피와 땀이 있기 때문에 흥민이의 골이 나오는 것이다.” 골을 넣는 선수가 주목받지만, 알다시피 골을 넣기까지는 여러 선수의 도움과 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무인도에서 부자가 없듯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다못해 우쭐거리고 뽐낼 수도 있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참 중요하고, 이렇게 함께 살아야 우리 삶이 이어지는 것이지요.
지난달에 치러진 전국지방동시선거에 보령에서도 많은 사람이 출마했습니다. 인구수가 작은 지역이다 보니 출마한 여당 야당 후보들 거의 아는 사람들입니다. 악수도 많이 하고 지원 부탁도 받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다 찍어주고 싶었지만, 투표용지를 보니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선거 운동 기간에 만날 때마다 공약으로 넣고 실천을 부탁한 것이 함께 사는 마을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선된다고 지방의 힘만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정책 방향을 잘 잡고 첫 단계인 함께 즐겁게 사는 일을 공론화한다면, 그다음에 또 할 일이 생기겠지요. 실제로 이런 일을 시행하는 곳들도 있습니다.
제가 사는 보령도 이런 일이 낯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부탁한 것은 우선순위를 올려달라는 것입니다. 지방에서 이제 정책의 최우선 순위 중 하나는 함께 사는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방 발전을 위해 기업 유치, 인구 유입 등 여러 정책을 내놓지만, 그런 정책이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예산 낭비이고 시간 낭비이고, 생색내기에 그칠 때도 많습니다.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라고 해도 마을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6. 녹색평론을 만든 고 김종철 선생님이 고마운 것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이반 일리치를 소개받은 것은 지금도 울림이 있습니다.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해서 2002년 12월 2일 76세를 일기로 독일에서 사망한 이반 일리치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였고, 시대를 앞선 성찰로 사람의 삶에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실 어느 시대든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 급진적으로 보이거나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말을 빌리면, ‘좋은 삶이란 거창한 구조물을 건축하거나 뛰어난 문화재를 남기거나 하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이웃과 함께 일하고, 서로 돕고 보살피는 가운데서 생을 즐기는데’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은 누구나 그 자체로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모두는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엮인 고마운 존재입니다. ‘경제적인 가치’가 없다고 해서 누군가를 내칠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위대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돌아보면 그 또한 공동체 가운데 일부입니다.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면 오히려 함께 사는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같은 식탁에서 함께 빵을 나누는 즐거움을 유트라펠리아(eutrapelia)란 말을 통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7.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도시재생 프로그램 일환으로 순천시를 다녀왔습니다. 도시재생 일에 참여하고 있기도 해서 마을 주민들과 순천시 구도심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 거리이지만 순천에 간 것은, 그리고 관심을 가진 것은 구도심 쇠락한 마을에서 함께 살기 위해 주민들이 어떻게 마음을 모으고 협력하는가였습니다. 사람 사는 일은 보령이나 순천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 더 관심을 두고 조금 더 마음을 주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모습 중에서도 주민들이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각자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그동안 힘들었다는 말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세계적인 문제라서 십분 이해가 되었고, 그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함께 사는 일을 지속하려고 한 모습은 충분한 배움의 장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잊지 않고, 떠난 사람을 기억하고, 그리움을 지금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어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오늘을 어제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제를 되돌아보면 내일을 새롭게 이어갈 수 있습니다. 함께 사는 것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일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함께 사는 것은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인식할 때부터 가능합니다. 한 사람의 존재가 공동체를 이어주기 때문이지요.
장례식장에 다녀온 이후로 가슴이 먹먹할 때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공동체를 생각했다는 것이 제가 사는 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한 사람을 위한 기도가 모두를 위한 기도임을 떠올립니다. 제가 간절히 신앙(信仰)하는 예수는 미처 헤아리지 못한 한 사람을 위해,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을 생각하며, 또 앞으로 함께 살기 위해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주체적인 사람으로 온 힘을 다해 살았던 그녀의 이름은 ‘기한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