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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많이 진정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중에는 국내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27명째 이르고 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져서 전국에서 휴업한 학교도 650곳을 넘어서고 있는 형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염병은 그 자체 감염도 무섭지만, 그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으로 공포감을 극대화해 사람들의 판단 능력을 무디게 하는 것이 더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른 시일 안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제압은 어렵겠지만, 바른 판단과 대처로 우리 사회가 안정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쓰기 며칠 전에 제가 사는 보령 지역 마을 만들기 사업 공모전이 있어서 심사했습니다. 첫날은 심사라기보다 마을 만들기 사업에 공모한 마을들의 사업 설명을 듣고, 심사에 앞서서 목적과 방향을 잡아주는 코칭(coaching)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 우려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을에서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참석한 마을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나눠드렸고, 대부분 마스크를 쓴 채로 공모전 설명회에 참여하고, 마을을 대표해서 발제한 대표자도 마스크를 쓴 채로 열심히 발제했습니다. 마스크 착용은 오히려 권장할 사항이라서 별생각 없이 지켜보는데, 조금 지나다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2. 공모전 발표는 단지 서류 제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설명도 하고 심사위원들과 질의 문답도 주고받아야 하는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표정을 도무지 볼 수 없었습니다. 얼굴 표정을 보지 못하니 이야기 내용도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저 혼자 느끼는 것일 수 있습니다만. 아무튼, 마스크를 쓴 채 이야기하는 발표자는 처음 본 모습이라서 심의를 위해 듣는 과정이 좀 당혹스럽긴 했습니다. 마을 만들기에 대한 코칭을 하다 보니 마을 사람들도 답답했는지 마스크를 벗기 시작했습니다. 가능하면 마스크를 쓰고 계시라고 권유를 했지만, 마스크를 벗고 드러낸 얼굴은 갑자기 신선하고(?)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얼굴을 본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눈동자를 깜박거리는 것도 다정하고, 얼굴 곳곳의 주름도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친근했습니다. 이렇게 가리지 않고 마주 보는 얼굴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얼굴을 드러내니 주변도 환해졌습니다. 노래에도 얼굴에 관한 이야기가 제법 있습니다. 학창 시절 자주 불렀던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
3. 마스크를 쓴다는 것은 호흡기를 보호하는 측면도 있을 터이고 전염을 차단하는 측면도 있지만, 얼굴을 감추고 싶을 때도 마스크를 씁니다. 작년 가을 홍콩에서 시위가 확산해 갈 때, 홍콩 정부는 52년 만에 긴급 법을 발동해 공공장소에서 복면금지법을 시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홍콩 정부는 신원 확인을 위해 모든 집회에서 마스크 착용을 금지했으나, 배우 주윤발을 비롯한 홍콩 시민들은 오히려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한 후 더욱 큰 항의 집회를 열었습니다. 감추고 속이는 당국을 향해 정작 복면금지법 대상이 누구냐는 항의였습니다. 감추지 말고 시민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보령은 매년 7월이면 대천해수욕장에서 머드 축제를 합니다. 요즘은 사람 많은 곳이 힘들어서 잘 가지 않지만, 초창기엔 머드 축제가 재미있었습니다(지금도 머드 축제는 재미있습니다). 머드를 얼굴과 몸에 바르면 사람들은 용감해지기 시작합니다. 머드를 통해 나를 감추다 보니 과한 행동도 나옵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즐거움을 만든다는 것은 권리일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타인과의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시절이 없다고 하는데, 누구를 의식하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나도 또한 다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서로 알아보지 못하니 머드 축제 자리엔 사람이 머문 흔적보다 휩쓸려간 흔적이 더 또렷합니다.
4.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마스크가 동이 나고 있습니다. 얼굴을 가려야만 안심이 되는 시대가 안타깝습니다. 전염병이 수그러들더라도 이제 불안감은 사람들 손에서 마스크를 놓지 못하게 할 것 같습니다. 감추고 숨기려는 사회 속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스크를 벗기고 싶었던 중국인 의사 리원량이 생각납니다.
리원량은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존재와 위험성을 처음 외부에 알렸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환자를 진료하다 감염돼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지난 2월 7일 새벽에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나이 34살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의로운 내부 고발자였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초창기 중국 공안 당국은 사회 혼란 우려 등을 이유로 그를 유언비어 유포자로 지목하고 소환해 ‘거짓 정보를 퍼뜨려 사회질서를 해쳤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결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고, 리원량도 당시 지침대로 보호 장비 없이 진료하다 감염됐습니다.
리원량은 입원 중 언론 인터뷰에서 “건강한 사회에서는 한목소리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해야 하고, 어느 것도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감춤은 불안을 극대화하고 불안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숙주가 됩니다.
5.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드러나는 것에 대한 의문이 큽니다. 잘 모르기도 했지만, 어릴 때는 뉴스의 진실성에 대해서 의심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거의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금은 뉴스를 대할 때마다 어떤 의도로 이렇게 만들었는지 한 번 더 생각합니다. 뉴스 자체가 진실을 가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갖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분별력도 의미가 없을 때는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뉴스에서 욕망의 흔적들을 발견할 때입니다.
감춤은 욕망의 다른 이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욕망을 감추려고 할 때,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은 커집니다. 리원량의 죽음은 중국 정부의 감춤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여겨집니다. 국민을 대상으로 감춰야 할 그 어떤 것, 그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정부의 욕망이 정의(正義)로 변하지 않습니다. 중국 정부가 국민과 동떨어진 길을 가고 있다면 그것은 국민을 배반한 욕망이 되고, 감추고 싶은 유혹은 걷잡을 수 없는 현실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한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 사태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써야 할 마스크를 오히려 정부가 쓰고 감춤의 눈으로 국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6.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마스크를 구매하는 일이 뉴스가 되고 있습니다. 사재기도 하고, 가격도 올리고… 의사협회는 건강한 사람은 특별히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마을 만들기 공모전 설명회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에게 상황이 중하다고 해서 높은 등급인 KF94 등급 마스크를 나눠줬습니다. 알고 보니 KF94 등급 마스크는 촘촘해서 나이 많으신 분들은 호흡이 불편한 점이 있더군요(마스크 등급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숨쉬기가 답답했는지 다들 코를 내놓고 입만 가리고 있었습니다. 굳이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될 마을을 만들고 싶은데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 앞에서 마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먼저 몸으로 느끼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사실 지금 마스크를 써야 할 상황은 천재지변이 일어나서가 아닙니다. 작은 마을 하나라도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 여러 사람의 바람은 뒤로 한 채, 욕망을 당위성으로 포장한 정치와 그리고 성장의 덫에 걸려서 자본을 쫓는 과학이 숙명처럼 수렁에서 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전염병의 출현은 자연을 황폐화한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환경 전염병”이라고 마크 제롬 월터스는 <자연의 역습, 환경 전염병>에서 말합니다. 숙명의 수렁에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지금 사태 뒤에 또 다른 전염병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7. 마을 사람들 마스크에서 이야기가 한참 나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신종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는데, 근본적인 욕망을 탓하지 않고 그 책임을 기껏해야 박쥐나 이름도 생소한 동물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난 한 해 브라질에서만 서울시 면적의 15배에 이르는 열대우림이 사라졌다고 하고, 양식장 물고기와 가축들에게 대량의 항생제가 투여되고,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연간 800만 톤이 넘는다는데 이런 상황은 생태학자들의 우려를 이미 한참 넘어서고 있습니다.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를 쓴 데이비드 콰먼은 신종 전염병을 인간과 병원체의 관계라는 넓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이러스나 세균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바이러스나 인간은 진화의 법칙을 따르는 자연의 일원이고, 지구라는 하나의 생태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생태계는 욕망이 넘쳐나는 인간 활동으로 점점 파괴되고 있습니다. 갈 곳 잃은 바이러스가 살길은 새로운 숙주를 찾는 것뿐이고, 개체 수가 많으면서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의 몸을 새로운 서식지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전쟁 양상을 보더라도 미사일 위협보다 작은 드론 공격의 위협이 커지는 것을 보면, 생태계도 작은 것들의 반격이 두려운 시대입니다. 가야 할 길은 점점 또렷하게 드러나는데, 방향은 계속 어긋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계속 만드는 것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으니 답답하다고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8. 보령 지역 마을 만들기 사업 공모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다음 주에 끝날 예정입니다. 아직 몇몇 마을은 코칭을 기다리면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만 아니었으면 일정이 벌써 끝났을 텐데 예기치 못한 영향을 마을 곳곳에서 받고 있습니다. 마을 할머니들은 오전 10시가 넘으면 마을회관으로 출근(?)을 합니다. 혼자 제대로 걷는 분은 거의 없고, 다들 유모차 비슷한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서 마을회관에 갔다가 오후 4시쯤이면 집으로 퇴근(?)을 합니다. 예전에는 마을회관에서 얼마나 잘 지내셨는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는데, 요즘은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마을회관에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얼굴을 제대로 드러내는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을 새삼 생각합니다. 예전에 보령시 폐광 마을인 성주면 먹방마을 주민 얼굴을 촬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진 촬영 전에 탄광 시절 기억도 떠올리면서 주민들과 짧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놀랍게도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탄광 생활로 인한 장애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탄광 막장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아왔는지 성한 곳 없이 장애인 급수별로 드러낸 고통스러운 몸은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몸의 흔적과는 상관없이 해맑게 웃으면서 촬영에 임하는 얼굴은 삶의 의지를 맑게 보여줬습니다.
일부러 암막을 배경으로 가린 곳 없이 얼굴만 드러나도록 촬영을 했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고 그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존중이 우러나옵니다. 우리 사회가 그분들의 얼굴을 가리는 일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9. 여전히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닙니다. 대통령도 마스크를 쓴 채로 TV에 나올 정도이니 지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 예방과 퇴치를 위해 마을 사람도 할머니도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인 지구가 건강하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마스크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을 줄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지구가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서는 인간도 살기 어렵다는 것을 지금 느끼고 있으니까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얼굴을 드러내서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세상이 필요합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올바른 당위가 실천의 영역에선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꿈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력감이나 두려움 대신 당장 삶의 현장에서 기본을 지키고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을 굳건하게 유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인류 전체의 약속으로 맞물린다면 그 어떤 수렁에서도 거뜬히 빠져나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은 마스크를 쓰지만, 내일은 맑게 드러낸 얼굴로 씩씩하게 숨을 내쉬고 싶습니다. 웃으면서 전혀 답답하지 않은 얼굴로 마을을 살기 좋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 얼굴을 보고 함께 희망을 꿈꾸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