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찬바람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농촌은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농촌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꿈은 아닙니다. 농촌이 많은 힘을 잃었다 해도 이미 원래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꿈도 아닙니다. 농촌은 이미 가야할 길을 오래 전부터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농촌의 소담한 꿈은 이 땅에서 함께 삶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농촌의 즐거움은 우리가 가진 가장 건강한 문화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챙겨주고, 그리고 그것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모두의 흥을 길게 늘어뜨려 주는 친근함의 원천입니다. 도시에서 놀러 온 이도 반갑고 이주민도 반갑고, 누구든지 반갑습니다.
보통 농촌에는 문화가 사라졌다고들 합니다. 요즘 농촌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그러나 사람 사는 곳에 어찌 문화가 없을까요? 이런 생각에는 텔레비전을 비롯한 미디어의 영향으로 도시적인 것만을 문화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을 테고, 인구 감소로 지역에 학교가 없어지니 공동문화의 생산이 줄어드는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농촌이 가지고 있는 모습 자체가 훌륭한 문화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주세요. 농촌의 문화는 농촌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한·미FTA 찬바람이 바야흐로 모습을 드러내려는 그 자리에서 북을 허리에 차고 징을 손에 들었습니다. 징소리에 맞춰서 들꽃마당에 농민들이 함께 모여 가을걷이 잔치를 벌였습니다. 가을걷이 잔치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기원입니다. 그런데 그 기원이 홀가분하지만은 않습니다. 2011년 한국의 가을 농촌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배추며 무며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폭락한 농산물 가격이 농민들 어깨 위에서는 천근만근 무게가 되었습니다. 예년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느낌이 다릅니다.
미국 농무부 경제연구소는 한·미FTA 체결로 인해 미국산 농축산물의 대 한국 수출이 연평균 2조876억 원씩 증가할 것으로 분석했다는군요. 이에 따라 한·미FTA는 사상 최악의 농업피해를 가져 올 것이라는 우려도 허투루 들리지 않지만, 농업을 여전히 수출산업의 하부구조로만 여기는 정부 정책의 결과가 노래진 배추밭에 투영된다는 것이 느낌의 강도를 다르게 만듭니다.
농업도 이제는 넓게 펼쳐진 세계 시장을 도전적으로 바라보라는 권유는 배추 한 포기 값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농업이 하나의 산업일 뿐만 아니라 생존의 조건 그 자체라는 인식을 조금만 더 가졌어도 오늘 우리 농촌과 농업의 모습이 이렇게 휘청거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한·미FTA 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그렇게 내세우는 강점을 가진 분야들이 과연 20년, 30년 후에도 여전히 강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리고 농업은 언제라도 이렇게 약하고 언제라도 우리 것으로 다시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일까요? 배추 한 포기의 무게라도 농민들 어깨에 쉽게 올려서는 안 됩니다.
농촌은 농촌 스스로에게 희망을 배웁니다. 젊은이라고는 손꼽을 정도고, 나이 드신 분들이 태반이기에 아무래도 희망을 만드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나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운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만 있다면 건강한 삶의 모습은 그 자체가 희망이 될 것입니다. 겨울, 그 황량한 땅을 보면서도 실망하지 않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생명의 모습 때문입니다.
한마당 잔치가 무르익습니다. 한마당 잔치의 경기는 우리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누가 더 우리의 모습을 잘 끌어내고, 그 즐거움을 잘 나눠주느냐 입니다. 각 마을별 두부 만들기, 이엉 엮기, 윷놀이, 물동이 이고 달리기, 용머리 엮기, 제기차기, 투호 등 불현듯 힘이 솟구칩니다. 핏줄이 탱탱해지고 근육이 꿈틀거립니다. 지금이 청춘입니다.
화사한 이름이 앞으로 나옵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일어섭니다. 이렇게 웃는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밝은 웃음 속에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앞으로 가야할 길임을 깨닫습니다. 함께 윷을 던지고 함께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들이 볏짚에서 뒹굴다가 새끼줄을 만듭니다. 옛날 줄이 아니라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붙들어주는 줄입니다. 볏짚 한 가닥은 약하고 약해서 당기면 부서지지만 그 연약한 것들이 서로 몸을 부둥켜안고 함께 있다면 누구라도 쉽게 부서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는 줄입니다. 이렇게 작은 줄이 할아버지에게서 아이들에게로 연결됩니다.
농민들 마음속에는 이렇게 가을걷이로 새해를 열었습니다. 꿈이 솟아납니다.
새해가 되면 씨앗을 뿌릴 때까지 긴 겨울을 지나야겠지만, 한바탕 난리 같은 소식들이 매섭게 몰아치겠지만, 그 겨울이 아무리 길더라도 그래도 봄은 오고 그 봄 위에 씨앗을 뿌리면 여름 바람이 생명을 키워내고 그러면 그것을 품에 안고 세상이 색색 물들 때, 허리에 북을 차고 한 손에 징을 다시 들 그때를 꿈꿉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저렇게 깔깔대고 흩뿌려진 지푸라기는 다시 몸을 부둥켜안아 누구라도 쉽게 부서뜨리지 못할 새 줄이 될 것을 꿈꿉니다.
꿈을 꾸면 얼어붙고 마른 땅이 움찔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