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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언제나 우리 삶의 밑바닥에서 서성거립니다.
이 두려움을 끄집어내서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마치 다독거리며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왜 두려움은 늘 우리를 떠나지 않을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두려움은 욕심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두려움의 본질을 한 번 헤아려 보세요.
그리고 그 때문에 겪는 고통의 모습을 살펴보세요.
나와 무관하게 다가와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얼마나 있을까요?
신영복 교수님이 쓴 글 중에 '나무야 나무야'라는 시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나무들이 도끼 자루가 되어 주지 않는 한,
나무는 도끼로 인하여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자주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게 강조하며 말할까요? 그 뜻은 무엇일까요?
두려움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방법은 ‘나를 내려놓는 것’,
오직 하나뿐입니다.
나를 붙들어 매고 욕심을 놓지 않는다면
두려움은 더 큰 힘을 얻어 나를 에워쌉니다.
최근 우리는 지루할 정도로 구제역 여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의 공포는 가축의 생사여탈뿐만 아니라,
이제는 살처분 매몰지의 2차 피해 후유증에 묻어서 연일 뉴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농민들에게는 2차 피해에 대한 염려보다도
아직도 여전한 속도로 번지는 구제역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큽니다.
돌아보면 구제역은 인간의 삶과 치열한 관계가 있습니다.
둘러 말하지 않아도 구제역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욕심과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 사회 탐욕의 구조가 구제역이 번지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바이러스가 주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바이러스는 여차하면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가에 계속 세워지고 있는 구제역 방역초소의 소독약이
이번 기회에 우리 욕심까지 소독해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또 자신도 어떻게 변형돼 나갈지 모르는 바이러스나
우리 욕심이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역초소 소독약은 그렇게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고통까지 받고 있습니다.
이미 가축들은 우리의 처참한 모습을 짊어지고 낮고 깊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제는 두려움 앞에 떨기보다 차분히 나를 내려놓을 시간입니다.
염려와 원망보다도 진지한 성찰과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돌아봐야 합니다. 내 두려움의 근원을.
지금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리고 지금 나를 내려놓지 않는다면
다음엔 우리가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피할 곳은 점점 없어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