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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1 23:29


1. 지금부터 일 년도 조금 더 된 즈음, 여기서 농촌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한 번 했습니다. 그때 대략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악기라곤 가끔 흥에 겨워 장단 맞추느라고 젓가락 정도 들었을 할아버지 할머니들(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닌 분도 있습니다만)이 모처럼 마음을 굳게 먹고 읍내 작은 오케스트라단 신입생 모집에 응했다고요. 얼마 전에 아내와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농촌에서도 여러 악기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일이고,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이런저런 어려움도 있었지만, 시스템이 발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읍내에 한 교회에서 작은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집한다고 했을 때 즐거운 상상이 펼쳐졌습니다. ‘오, 이런 농촌에서 오케스트라라니….’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가 이런 기회가 참 좋다면서 나이 든 분들에게 참여하도록 한 사람씩 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연로한 농민들은 처음엔 어림도 없는 소릴 한다며 남의 이야기 듣듯이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근한 꽹과리나 징도 아니고,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클라리넷 등이라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악기를 배워야 할 당위성(?) 이를테면, 음악 공부가 치매 예방에 최고라느니, 소질이 있어 보인다(?)는 둥 여러 이야기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누구라도 어릴 때 배우고 싶었던 간절함은 있었고, 이제 그때가 되었다는 것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농부의 손이면 무엇이든지 진지하게 대할 수 있으므로 악기를 배우는 진도가 빠르지 않아도 찬찬히 스스로 즐거움은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신청자들이 생겼습니다. 대략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동안 과정이 되었습니다.


매주 일요일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일요일 저녁이면 같이 모여서 악기를 배우러 갑니다. 악기를 직접 구매한 이도 있고 임대를 해서 연습하는 이도 있습니다. 몇 번 연주회를 하고 나니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나 봅니다. 아직도 악기를 제대로 잡는 것이 버거울 수 있지만 꿈이 생겨서 좋습니다. 예전엔 이맘때면 농사짓고 수확의 꿈만 있었지만, 이젠 악기를 바라보면서 함께 연주하는 멋진 꿈을 갖습니다.




2. 요즘 보령시에서 농촌 마을 문화예술공동체 사업을 벌였습니다. 농촌 마을 문화예술공동체 사업은 농촌에서 주민들 스스로 문화예술공동체를 꾸릴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이를 통해 농촌 마을이 삶의 질을 회복하고, 나아가서 지속 가능한 지역공동체의 방향성을 모색해 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또 자치단체에서 계획을 세우는 초창기부터 자문 역할을 했습니다. 마을마다 문화예술에 상당한 영역을 넓히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원주민으로서, 또 귀촌해서 자리를 잡고 살면서 대단한 역량을 보이는 분들을 보면 괜히 설렜습니다. 이 사업의 가장 큰 특징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가능하면 마을공동체에 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을 뿌리고 3년, 5년을 넘어 문화예술이 공동체 기반의 축으로 자리를 잡고 풍성한 즐거움을 만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올해는 10개 마을이 우선 선정 대상입니다. 


당연히 우리 마을도 신청했습니다. 단체 이름은 지역명을 넣어서 ‘천북들꽃오케스트라’로 지었습니다. 다시 한번 음악에 관해 관심 있는 이들을 찾아 나섰고 숨어 있는 인재를 발굴(?)했습니다. 덕분에 목장 며느리로 시집왔지만, 원래 음악대학에서 타악기를 전공한 이도 나타났고 색소폰 동호회에서도 몇 분이 참여했습니다. 바이올린과 클라리넷과 플루트를 조금씩 접한 이들도 의욕을 가지고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3. 색소폰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문화예술공동체 공모전에 응모하면서 ‘천북들꽃오케스트라’ 단장에 나창근 씨를 대표 겸 단장으로 선임했습니다. 나창근 대표는 70대 초반입니다. 연주하는 악기는 색소폰입니다. 나창근 대표는 15년 전에 귀촌했습니다. 민간기업 고위직에 있으면서 은퇴를 앞둔 때인데, 이리저리 살 집을 찾다가 바다 위 언덕에 멋진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부부가 산림 공부와 산나물 농사를 배우면서 지역 동호회에서 색소폰을 배웠습니다. 5년쯤 지나서 동호회 연주회에 가보니 나창근 대표의 색소폰 연주가 무척 진지하고 학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연로하지만 2년제인 군산시 서해대학교 음악과에 가기를 권유했습니다. 내심 지역 음악 선생님으로 활동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나이 때문에 망설이더니 용기를 내서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색소폰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2년 동안 날마다 보령에서 군산으로 학교에 다녔습니다. 처음엔 힘들어하시더니 차츰 음악에 심취하면서 학교 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에 졸업했습니다. 음악을 공부하고 나니 나이가 70이 넘은 거지요. 비슷한 방식으로 지역에서 음악에 소질이 있는 분들에게 권유(?)했습니다. 꼭 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길을 나름 열어드렸습니다. 




4. 잠깐 농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농촌 오케스트라를 만들고자 한 이유도 오늘 농촌의 현실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이야기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올 신년사를 돌아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국민을 예순네 번 언급했습니다.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 소상공인과 영세 중소기업, 청년, 재벌, 서민, 중소상인, 아동, 장기소액연체자, 노동자, 저소득층, 어르신, 여성, 위안부 할머니 등 소중한 분들을 촘촘하게 챙겼습니다. 아쉬운 것은 어디에도 농민, 농촌은 없었습니다. 농민과 농촌은 중요정책에서 한참 밀려나 있습니다. 더욱이 내년도 정부 예산은 6.8% 증액한 슈퍼예산을 편성했으나 농업예산은 4.1% 감액됐습니다. 농업예산 감액은 사상 초유의 사태입니다.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국가 농정의 기본 틀부터 바꾸겠다.’, ‘농민이 안심하고 농사짓는 나라’, ‘여성 농업인의 위상을 높이고 미래농업인력 육성’, ‘먹거리가 안전한, 건강한 대한민국’, ‘살맛 나는 농어촌’, ‘지역 일자리와 소득을 늘려 미래농업 대비’, ‘수산업을 살리고 어업인의 권익 제고’라는 7대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일 년 넘게 지켜보니 그저 공약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농촌의 현실입니다. 어느 정치인 말대로 경기도민이 1,000만 명이라고 하는데 농민 수는 30만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인은 표를 먹고 사는데 농민을 위한 특별한 정책을 펼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또 현재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농어업의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2% 이하, 취업자와 농가 인구의 비중은 5% 수준으로 급락했습니다. 악순환이라고 할까, 지금 농촌은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왜 농업, 농민, 농촌은 오늘 이렇게까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왜 다들 농촌의 위기를 외면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경제 성장지상주의 때문입니다. 믿음이 참 강합니다. 경제는 무한히 성장한다는 믿음,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가치들은 희생해도 괜찮다는 믿음. 이 믿음의 희생양이 농업, 농민, 농촌입니다. 우리 사회는 많은 문제가 성장주의에서 비롯된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성장을 통해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과 같은 경제구조에서는 성장주의가 오히려 문제를 악화할 뿐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을 들고나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은 경제성장률에 연연하면서 혁신성장을 내세워 다시 성장주의로 선회하고 있습니다.




5. 농업, 농민, 농촌의 비중이 작아지는 것은 경제발전의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런데 농민과 농업의 비중이 작아졌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농업, 농민, 농촌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농업의 비중은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한결같이 농업, 농민, 농촌에 두터운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예를 보면, 농가 인구는 1%, 농업생산의 비중은 0.6%에 지나지 않지만, 농업예산은 그 열 배인 6%에 달합니다. 국내총생산(GDP)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농업·농촌이 지니는 다원적 기능과 공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성장주의로 농업, 농민, 농촌을 바라보면 농민도 불행하고 국민도 불행합니다. 농정 패러다임을 국가의 기반과 국민 행복에 기여하는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농정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농업·농촌의 다원적 기능과 공익적 가치를 우리 사회가 인정을 해야 합니다. 지난번 개헌 논의 과정에서 이것이 개정 헌법 초안에 들어간 이유입니다. 농민과 농촌이 불행하면 나라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모두 공감해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대한 담론 같아서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렇다고 막연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농촌 현실이 안타깝지만 여러 곳에서 답답함을 뚫고 새로운 길을 만드는 노력을 봅니다. 농촌에서 스스로 가야 할 길 가운데 하나를 우리도 갑니다. 고령화, 열악함, 해체, 폐교, 불모지, 폭락 등 익숙한 단어가 넘쳐나지만, 하나하나 위로하고 보듬으면서 작은 문화예술의 힘으로 함께 하려고 합니다. 희망은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입니다. 상상의 힘은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상상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 농촌의 희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가 클라리넷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할머니들이 작은 오케스트라 문턱을 수줍게 넘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6. 들꽃오케스트라가 나름 멘토로 삼은 것은 엘 시스테마(El Sistema)입니다. 지난번에도 한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내용을 옮깁니다.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음악교육 시스템이자 관련 재단의 이름입니다. 수십만 명의 청소년들이 거쳐 간 엘 시스테마의 시작은 1975년 11명의 빈민가 아이들로 구성된 소규모 오케스트라였습니다. 경제학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빈민가의 한 차고에서 ‘총 대신 바이올린을! 마약 대신 클라리넷을!’이란 구호를 내걸고 거리의 아이들 손에 악기를 쥐여 주면서 음악을 통한 사회 변화를 시도한 게 엘 시스테마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아브레우는 오케스트라가 지닌 정체성, 즉 다양한 악기들이 모여 일체감 높은 하모니를 이룬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엘 시스테마는 교육 방식부터 달랐습니다. 보통 클래식 악기의 교육방법은 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연주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악기에 숙달되기 전에 베토벤이나 차이콥스키의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으며, 때로 교육과정을 지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엘 시스테마는 새로운 교육방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무조건 연주를 시킨 것입니다. 엘 시스테마는 “음악은 즐겁게 한다.”, “연주하면서 음악을 배운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아이들이 최단 기간 내에 베토벤을 연주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기술 하나하나에 숙달하는 것보다 전체를 먼저 맛보도록 해주는 것이 엘 시스테마의 원칙입니다. 전체를 맛본 후에 다시 기술 하나하나를 좀 더 다듬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평균 나이가 월등히 많은 들꽃오케스트라는 음악적인 완성도보다 음악을 누리는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간 악기 다루는 것을 보니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감동하기도 하고요. 연습을 위한 회의를 할 때 진지한 모습은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계속 연습을 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목표를 성취했을 때의 기쁨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음악이 주는 긍정의 에너지를 삶의 영양분으로 흡수했습니다. 일 년 전의 모습이기도 하고 지금 모습이기도 합니다. 농촌에 이렇게 삶의 에너지가 모일 때 우리 사회도 보다 좋은 방향으로 바뀌리라고 믿습니다.




7. 지난 7월 24일 심사가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26개 팀이 신청을 했고, 그중 ‘천북들꽃오케스트라’를 포함해서 10개 팀이 선정됐습니다. 도자기 팀도 있고, 문학 팀도 있고, 디자인 팀도 있고, 꽃 팀도 있고, 할머니 음식 팀도 있습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면서 농촌 삶의 질을 회복하는 길을 가려고 합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도 있지만, 정말 나이에 메이지 않고 즐거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농민과 농촌이 행복한 나라가 진짜 행복한 나라가 돼야지요. 여러분의 응원이 필요합니다. 11월쯤 ‘천북들꽃오케스트라’ 첫 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는 전교생 오케스트라단인 낙동초등학교 아이들도 같이 하고, 천북중학교 아이들도 같이 합니다. 유쾌한 바람이 붑니다. 미리 초대하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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