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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마을도 좋아요농촌이야기 2019. 4. 11. 09:53
1. 제가 사는 신죽리 마을은 90세 근저에 있는 분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장수하시는 어른들이 늘어나서 좋기도 하지만, 젊은이라고는 한 갑자(甲子) 도는 제가 그 자리를 차지고 있는 마당에 마을이 연로해지는 느낌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얼마 전에도 박채희 할머니가 어떻게 사시는지 둘러보러 갔다가 나이를 여쭸더니 90세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외모는 당연히 나이 드신 티가 많이 나지만, 그래도 90세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마 옛 생각이 나시는 가 봅니다. 제 손을 잡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일찍 시집와서 속상해.’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물어보니 하시는 말씀이, 일제 강점기 말에 시국이 정신없는 가운데 남자들은 징집돼서 끌려가고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간다는 말에 마을이 점점 흉흉해지자 아버지가 걱정돼서 딸을 생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러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정씨 성에 이름이 산해이신 남편에게 얼른 시집 보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나이가 열다섯 즈음이었습니다.
얼굴을 보니 살짝 억울한 기색이 비쳤습니다. 그래서 위로(?)해 드릴 겸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도 즐겁게 살지 않으셨습니까. 자녀들도 다 이렇게 잘살고 있고요.’ 다시 돌아오는 말씀은 ‘재미도 있었지. 그래도 지금 같으면 그렇게 시집가서 안 살았을 거야. 어쩔 수 없으니까 살았지.’였습니다. 제가 떠올리는 돌아가신 어른은 참 선하신 분이었고, 특히 우리 마을에서 대파 농사는 그분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밭농사에도 일가견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벌써 세상 떠나신 지도 20년이 넘었습니다. 물론 부부는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관계라지만, 그래도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옆에서 보면 박채희 할머니가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살아온 삶이 싫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찍 시집와서 3남 3녀 자녀를 두었는데, 큰딸은 올해 일흔다섯으로 손주도 많이 두었습니다. 막내아들도 오십이 넘었고요. 돌아보면 험한 세월을 보내신 것은 분명합니다.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해방 후 한국전쟁의 파고를 넘고, 농부의 아내로 살아오면서 보릿고개 하며 새마을운동 등 역사의 현장에서 이름 없는 민중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사연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일찍 시집온 것을 투정하듯이 때로 고생한 이야기도 내놓으시지만, 그래도 지혜롭게 살아오셨다는 것은 삶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연로하셔도 박채희 할머니가 계시면 마을 사람들은 차분해집니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마을에 모임이 있으면 박채희 할머니가 어디에 계신지 두리번거립니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은하게 삶의 무게를 드리울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2. 김예한 할머니 집에 갔습니다. 올해 88세이신 할아버지는 뒷방에서 거동도 안 합니다. 왜 그러신지 물어보니 엊그제 사촌 동생 장례식에 다녀온 뒤로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근에 나이가 엇비슷한 동생들이 세상을 뜨는 일이 생기면서 상심이 커졌습니다. 할머니가 고구마밭을 갈아달라고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술 한잔만 해도 ‘이놈들이 먼저 가다니… 내가 먼저 가야 하는데…’ 계속 한탄만 하시고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아직 정정하시고, 장날엔 술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로 아침 일찍부터 읍내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이 선한데 이렇게 힘을 잃으시니 옆에서 걱정하는 할머니 모습도 안타까웠습니다. 아마 시간이 갈수록 이런 일이 점점 더 생길 테고, 두 분 건강도 걱정이 됩니다.
할머니도 나름대로 큰 걱정을 갖고 있습니다. 손주들이 장성했는데, 다들 혼인할 생각을 안 한다고 합니다. 손주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할머니로서 걱정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저를 볼 때마다 손주 한 명 한 명 이름을 대가며 직장은 어디고, 사는 형편은 이런 데 혼인할 짝이 없다고, 저보고 아는 사람 좀 대보라고 채근(?)하기도 합니다. 저도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이 장성하니 이제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도 김예한 할머니는 부지런합니다. 마당은 늘 깔끔하고 주변의 나무들도 정겹게 만져놓습니다. 조용한 마을에 꽃 한 송이라도 예쁘게 피어 있으면 주변이 다르게 보입니다. 농촌 마을은 내 집 손질이 집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옆집까지도 미치니까, 내 집만 가꾸는 것 같아도 그런 모습이 이어져서 마을이 아름답게 변합니다. 농촌 마을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공동체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어느 해 가을은 마을 길이 보라색 꽃으로 가득했습니다. 신기해서 부녀회장에게 물어보니 집에 심은 꽃씨를 봄에 나눠주고 각자 자기 집 앞길에 심었더니 이렇게 화사해졌다고 말해줬습니다. 마을은 누구 한 분만 부지런해도 모습이 즐겁게 변합니다. 김예한 할머니는 그 주인공입니다.3. 보령시 마을 소액사업 심사위원장으로 지난 4월 초에 여러 마을 심사를 했습니다. 요즘 전국적으로 도시에서는 도시재생사업, 농촌에서는 마을 만들기 사업이 활발합니다. 저도 이런 일에 조금 참여하고 있는데, 제가 사는 보령시는 농촌 마을 주민들이 일정의 교육을 받은 후 마을 발전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해보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차츰 단계를 밟아가도록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을 주민들이 서로 배려하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그중 한 마을이 주산면 황율1리입니다. 황율1리 임광룡 이장은 올해 75세로, 교육계에 있을 때 보령시 여러 학교 교장 선생님을 역임한 분입니다. 아마 선생님을 하실 때부터 꽃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황율1리 마을 만들기 사업 제안서를 가지고 나오셨는데, 마을을 근사한 정원으로 만드는 청사진을 보여줬습니다. 다양한 꽃 식재와 더불어 마을 구석구석에 애정 어린 마음을 담아 정원을 만드는 일을 열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분이 감동을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설명을 다 마치고 마지막 발언을 정리하던 중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이 약간 굳어지면서 현재 자신의 건강 상태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재 암 투병 중인데 암 4기 판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삶을 내려놓은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 단 하나, 바로 마을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드는 일의 기초는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가슴이 찡하게 울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흔다섯이 되도록 살아온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 터전이 된 마을이 자꾸 쇠락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어서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몰라도 마을을 위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꽃 심기는 꼭 하고 싶다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중간중간 목이 메 잠시 이야기를 멈추는 시간엔 모두 마을 만들기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황율1리에서 함께 온 마을 사람들도 모두 임광룡 이장 나이 또래였습니다. 손은 거칠고, 얼굴은 봄볕에 탔습니다. 같이 바라보는 모습이 대단했습니다. 비록 농촌에 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사람 살아가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웃 간 유대감을 높이며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이 나이가 돼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 있고, 열정이 있는 것을 보여준 황율1리와 임광룡 이장은 박수 받아 마땅합니다.4. 비록 나이가 많아도 마을에는 공감하고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세토 효과’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삶의 조건이 비록 열악해도 서로 돕는 문화를 통해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1961년경 미국 펜실베이니아 동부지역의 로세토(Roseto) 지역을 내과 의사 울프가 조사 후 발표한 내용입니다. 로세토 마을은 이탈리아 이주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동네였지만, 이 마을 65세 이상의 노인들의 심장병 사망률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3분의 1이나 낮았습니다. 울프의 조사를 보면, 로세토 사람들의 생활습관은 오히려 심장병에 걸리기에 쉬운 조건이었습니다. 먹는 음식이나 흡연, 술 등은 미국 내 다른 마을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구의 결론은 먹는 음식이나 생활습관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가 해답이었습니다. 소득·주거환경·의료시설·음식 등 통상적으로 건강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은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이웃 마을과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로세토 마을의 유독 높은 이웃 간 유대감과 강한 응집력이었습니다. 삶의 조건이 열악했지만, 상호존중과 협동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건강하게 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울프는 이것을 ‘로세토 효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로세토 마을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심장병 사망률은 결국 이웃 마을과 비슷해집니다. 로세토 효과는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 함께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얼마나 거대하고 중요한지 질문을 던집니다. 행복한 마을의 힘은 마을 내에 있습니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상호존중과 배려만으로도 마을은 놀라울 만큼 행복해집니다.
오늘 농촌이 고령화로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나이에 상관없이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고, 스스로 유대감의 바탕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죽리 박선희 할머니는 올해 80세입니다. 허리도 아프고 자신도 힘들지만, 날마다 마을회관에 모이는 노인들의 밥을 해드립니다.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으면, 밥은 전기밥솥이 해주는데 힘들 거 무어 있느냐고 웃습니다. 반찬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면서요. 혼자 사는 노인들은 집에 있으면 귀찮기도 해서(?) 밥 먹기가 쉽지 않은데, 마을회관에 모이면 같이 웃고 맛있게 밥 먹고 윷놀이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퇴근(?)하는 발걸음도 가볍습니다.5.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는데, 요즘 천북면 신죽리 마을은 오케스트라 합주 연습이 한창입니다. 단원 구성을 보면 가장 젊은 40대가 두 명 정도 있지만, 그 외는 60대가 중축을 이루고 70대가 그다음으로 많습니다. 작년에는 클라리넷이나 색소폰은 삑 소리도 나고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줄 떨리는 소리가 제법 났지만, 이제는 제법 안정된 소리를 들려줍니다. 마을 오케스트라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나이야 세월 따라간다지만, 사람의 마음은 세월을 거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가운데 일주일에 한두 번 밤에 모여 연습하는 70세 넘은 분들의 세련되지 않은 연주가 듣고 있으면 참 유쾌합니다. 봄바람도 더욱 상큼해지고요.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농촌이 젊어지는 비결(?)을 이야기했습니다. 요즘 어지간한 마을은 거의 70세가 넘은 노인 마을이지만, 어차피 현실을 인정한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20년씩 젊게 살면 된다고요. 20년 전에, 아니 50년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지금부터 하자고 했습니다. 오늘 젊게 살면 내일도 젊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노래 제목에도 있듯이 ‘내 나이가 어때서’는 지금 내 이야기라고요. 그래서 악기도 배우면 좋겠다고 요청을 했습니다.
최근 도의원 한 분이 보령시 지역경제 활성화 세미나를 열었는데, 그날 다른 일이 있어서 참석은 못 하고 다른 분이 보내준 세미나 사진을 봤습니다. 여러 곳에서 온 토론자들이 열띤 토론을 통해 보령시 앞날을 설계했다는 보충 설명도 읽었습니다. 그런데 세미나 방청을 위해 참석하신 분들 모습을 보니 지방소멸이라는 심각한 위기에 보령시가 처했다는 뉴스가 실감이 났습니다. 물론 낮에 세미나를 해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무척 연로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참을 보다가 이 또한 현실을 인정하고 젊은 보령을 만드는 길을 찾는다면 결국 우리가 젊게 살아야 한다고 다시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 들었다는 것이 걸림돌이 될 수 없으니까요. 아니, 공감하는 분들이 함께 살아간다면 새로운 공동체로 나가는 길이 열린다고 믿습니다.6. 조금 전, 광천읍에 살면서 노래와 율동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오인옥 할머니(?)에게서 카카오톡이 왔습니다. 제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전했습니다. 할머니라고 하기엔 좀 난감합니다. 이제 겨우(?) 66세이거든요. 마을에선 64세까지 청년회원인데 청년회원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손자들도 장성하니 할머니는 할머니지요. 유쾌한 분입니다. 가는 곳마다 노인 팬층이 형성되고, 분위기를 무척 즐겁게 만듭니다. 오랫동안 못 뵈었는데 sns로나마 소식을 접하니 좋습니다. 나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갈수록 더 씩씩하신 것 같습니다.
마을이 나이 드는 것은 분명합니다.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지 오래되었다는 이야기는 하도 들어서 이제 그만해야겠습니다. 나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한 세상이라고 해도 마을에서는 같이 사는 것이 새로운 길입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집 앞에 꽃 한 송이 심어 나누는 것만 해도, 밥 한 그릇 같이 먹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도, 마을을 사랑하기만 해도, 서로 손을 잡을 수만 있어도 마을은 행복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누리는 유대감이 마을을 젊게 합니다. 이웃집 형광등 고장 난 것을 내 집처럼 고쳐주러 가는 발걸음에서 다시 한번 마을의 새로운 길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