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마지막 시간은 늘 경이로움을 초대해 놓고 물러간다.
지나간 쓸쓸함은 이렇게 놀라운 생명을 부르는 노래였나 보다,
눈에 덮이고 얼음에 갇히고 찬 기운에 꽁꽁 굳은 흙은
어느 틈에 보드랍게 풀어지고 마치 처음 엄마가 된 것처럼
조심조심 깊숙한 생명을 하나하나 끌어 올린다.
얼마나 놀라운 3월인가? 얼마나 부풀어 오른 봄인가?
그렇구나.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불어오는 바람도, 파란 하늘도, 흐르는 냇물도, 농부의 숨소리도
모두 시작이다. 꿈꾸는 일까지도
봄기운 따라 작은 발걸음들이 모였다.
엄마 손, 할머니 손, 할아버지 손까지 잡고 모인 아이들.
오늘은 입학식이다. 농촌의 초등학교 입학식.
뉴스를 보니 강원도는 작년보다 초등학교 아이들 수가 5,691명이나 줄었고,
신입생이 아예 없거나 1명뿐인 학교가 57개나 된다고 한다.
하긴 들꽃마당학교가 있는 보령시의 33개 초등학교 가운데 22개 학교는 신입생 수가 10명 이하라니 다른 동네 이야기를 할 것도 없겠다.
관련 뉴스 하나 더.
국내 농가인구가 2010년 306만 8,000명에서 2011년 296만 5,000명으로 한해 사이 3.4%(10만 3,000명) 급감했다고 한다. 지난 2002년 농가인구 400만 명 선이 붕괴된 지 꼭 10년 만이다. 그 10년은 노동력의 붕괴는 말할 것도 없고, 농촌 마을과 문화와 전통이 해체되는 시간이었다.
냉정하게 농촌의 앞날을 계산하는 뉴스는 봄기운을 다시 얼어붙게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올망졸망 모인 아이들 얼굴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다.
지난겨울, 황량한 땅에 이제는 푸른 싹이 도무지 보이지 않을 것 같더니만
바람결 뒤끝에서 순간 자리 잡고 제 모습을 드러낸 저 작은 풀꽃처럼
이 아이들도 어디에서 머물다가 이렇게 해맑은 웃음을 드러내는지.
2012년 입학생 7명. 숫자도 좋다.
언니들은 환한 웃음으로 동생들을 맞는다.
벌써 3년 전에 통폐합했어야 할 학교가 아이들 발끝에서 생기를 들이마신다.
그래, 이렇게 아이들이 있는데 학교는 당연히 있어야지.
아이들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전한 모습으로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리는데
농촌을 의기소침하게 하지 말아야지.
의자에 앉아 흔들거리는 아이들 모습이 꿈처럼 보인다.
그렇구나.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큰물도 작은 실개천이 흘러내려야 이루어지는 것처럼.
3학년이 된 영민 이와 승주가 어깨를 맞댄다.
언제나 같은 학년, 같은 반, 같은 책상. 같은 얼굴.
어쩌면 인생도 이렇게 같이 기대고 서로 격려해야 할 테지.
그래, 너희도 시작이다. 부푼 봄은 너희 것이다.
이제 축하 떡을 나누는 시간.
촛불을 끄고 더 밝은 너희 얼굴빛으로 세상을 비춰주렴.
유치원 동생들도 같이 나와 그 빛을 더하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돌리는 떡 그릇마다 웃음 가득 꿈이 가득.
인사.
함께 선 유치원 동생들보다는 조금 더 의젓하게
선생님과 언니들에게 처음으로 하는 인사.
시간이 가면 2학년도 되고 3학년도 되겠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낯설어서 어떻게 학교에 다녀야 할지
지켜보는 엄마 아빠들은 마냥 안쓰럽고 궁금하다.
사실 농촌의 앞날에 후한 점수를 주는 이들은 그리 없다.
작년 한 해 동안만 해도 농촌은 심한 몸살을 앓았다. FTA 파고(波高)는 둘째로 치더라도 배추를 비롯한 농산물 가격은 곤두박질치고, 한우는 마치 애물단지처럼 변했다. 육우 송아지는 강아지 값만도 못할 때가 있었고···.
지금 300만 명 아래로 떨어진 농가 인구 중 삼분의 일은 65세 이상 어르신들이다. 그리고 아이들 데리러 늘 가는 마을처럼 내비게이션에 길이 나오지 않는 곳도 있다. 마치 농촌은 거저 들어와 살라고 해도 들어오기 어려운 곳처럼 되었다.
백약이 무효인 것 같기만 한 농촌. 어떤 묘안이 있어야 할까?
그래서 매서운 추위 견딘 후 스스로 보드랍게 변하는 땅을 본다. 도무지 생명이라곤 송두리째 없어진 것 같은 땅속에서 하나하나 솟아나는 꽃봉오리의 경이로움을 본다. 그리고 생명의 땅을 성큼성큼 내딛는 아이들을 본다.
아이들이 시작이다.
부푼 봄처럼 싱그럽게 뛰노는 아이들이 새로운 시작이다.
신입생이 한 명도 없는 농촌학교가 전국에서 100개를 훌쩍 넘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희망의 시작은 아이들이다.
부디 풀 죽지 말고 잘 자라서 딛고 선 땅에게 생명 노래 배우노라면
마른 땅 같은 농촌에 툭툭 꽃봉오리 터지게 될 날이 올 것을.
그렇게 기다리며 아무쪼록 웃어라.
웃음소리 커질수록 봄 내음 따라 우리 농촌도 기지개 켜리니.